한보사태 주역으로 2007년 재판을 받다 잠적한 정태수 전 한보그룹 총회장은 키르기스스탄과 에콰도르 등에서 위조 여권을 이용해 12년간 도피 생활을 하다가 지난해 말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검찰은 정 전 회장이 지난해 에콰도르에서 사망했다는 내용이 담긴 문서자료 등을 확보하고, 21년만에 국내로 강제송환된 정 전 회장의 4남 정한근씨의 진술 등을 토대로 정 회장의 실제 사망 여부와 해외 재산 등을 추적하는 조사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25일 검찰에 따르면 서울중앙지검 외사부(부장 예세민)는 22일 국내로 송환된 정씨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아버지가 지난해 12월1일 에콰도르에서 숨져 현지에서 화장했다”는 진술을 확보했다. 정씨는 조사에서 정 전 회장의 사망 사실을 입증할 관련 자료가 파나마 당국에 압수된 소지품에 들어있다고 진술했다.
정씨의 진술에 따라 검찰은 24일 외교행랑을 통해 체포 당시 정씨가 소지하던 물품들을 인계 받았다. 그의 소지품에는 정 전 회장 사망 증명서, 정 전 회장의 키르기스스탄 국적 위조 여권, 유골함 등이 포함돼 있었다. 에콰도르 당국이 발급한 정 전 회장 사망 증명서에는 정 전 회장의 위조 여권상 이름과 함께 그가 지난해 12월 숨졌다는 내용이 적힌 것으로 확인됐다. 증명서에 표기된 사망 사유는 ‘신부전증 악화에 따른 심정지’. 실제 정 전 회장은 오래 전부터 신장 관련 질환으로 투석을 받아 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정씨는 검찰 조사에서 “부친 건강이 위독해져 병원으로 모시고 갔지만 연명이 어려운 상태였다”고 진술했다.
검찰은 사망증명서가 믿을 만하다고 일단 판단하면서도 정확한 진위를 가리기 위해 에콰도르 당국에 사망증명서 발급 사실을 확인해 줄 것을 요청했다. 또 에콰도르에 수사 인력을 파견해 현지 당국과 접촉하는 한편 화장시설 등을 확인해 간접적으로 정 전 회장의 사망 여부를 가리기로 했다.
정씨가 소지하던 정 전 회장의 위조 여권은 키르기스스탄에서 2010년 발급된 것으로 확인됐다. 검찰은 정 전 회장 부자가 위조 여권을 이용해 키르기스스탄 등에서 도피생활을 계속하다 2년 전 에콰도르 과야킬에 정착한 것으로 보고 있다. 과야킬은 수도 키토에서 약 500㎞ 떨어진 태평양 연안 도시다. 한근 씨는 “아버지가 따뜻한 곳으로 가고 싶어 해 에콰도르 안에서도 적도에 가까운 과야킬에 자리를 잡았다”고 진술했다.
정 전 회장의 사망이 최종 확인될 경우 2,225억원대에 이르는 국세 체납액은 환수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현행법상 체납된 세금은 상속되지 않는다. 다만 검찰은 정씨가 1997년 한보사태 직후 스위스 비밀계좌로 빼돌린 회사 자금 3,270만 달러(379억원) 등 한보 관련 해외 비자금을 추적하는데 수사력을 집중하기로 했다. 2001년 국세청이 고발했으나 일부 피의자들이 기소중지된 한보그룹의 조세포탈·재산 국외 도피 혐의도 다시 들여다보고 있다.
최동순 기자 dosoo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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