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와인만큼 역사와 문화가 깊이 깃든 술이 있을까요. 역사 속 와인, 와인 속 역사 이야기가 매주 수요일 <한국일보>에 찾아 옵니다. 2018년 한국소믈리에대회 어드바이저부문 우승자인 시대의창 출판사 김성실 대표가 글을 씁니다.
프로방스로 가는 길은 멀었다. 오랜 시간 동안 몇 차례의 비행에 지쳐 버린 우리 일행은 지중해가 펼쳐진 니스의 한 레스토랑 테라스에 자리해 음식을 주문했다. 드디어 도착한 프로방스에서의 첫 끼니였다. 우리는 지역 대표 요리인 부야베스와 살라드 니수아즈를 주문했다. ‘맛 좋은 와인’을 곁들이고 싶었지만 그곳 와인 리스트에는 로제와인 이름만 빼곡했다.
고백하자면, 나는 시음할 때 말고는 로제와인을 거의 마시지 않았다. 색과 향만 그럴싸할 뿐 화이트도 레드도 아닌 것이, 맛이 기대 이하일 거라는 선입견 탓이었다. 하지만 ‘로마법’을 따르는 게 여행자의 자세 아니던가.
소믈리에가 스키틀(Skittle) 또는 플뤼트 아 코르셋(Flûte à Corset)이라고 불리는 허리가 잘록한 병에 담긴 로제를 따라 주었다. 부야베스를 오물거리다 로제를 한 모금 삼켰다. 신기하게도 생선이 전혀 비리지 않았다. 요리도 맛있는데 와인 맛은 더 기가 막혔다. 이런 게 바로 마리아주(Mariage)로구나! 여행은 생각의 단단한 틀을 깨는 유연한 도끼임에 틀림없다.
와인 때문일까, 저 멀리 에메랄드빛 바다와 코발트빛 하늘이 블렌딩돼어 경계가 사라졌다. 아련한 경계 너머에서 갯내 대신 허브향을 머금은 바람이 불어왔다. 프로방스가 나에게 성큼, 다가왔다.
프로방스로 출발하기 전 알퐁스 도데의 단편집을 읽었다. 프로방스와 관련한 자료를 찾다가 그의 작품 배경이 대부분 그곳이라는 걸 알게 됐기 때문이다. 익숙한 작품인 ‘별’을 먼저 읽었는데, 지금껏 소년인 줄 알았던 주인공 양치기가 알고 보니 스무 살 청년이란다! 아마도 ‘소나기’와 이미지가 뒤섞였었나 보다. 도데를 읽었기 때문일까, 자신의 어깨에 기대어 잠든 스테파네트를 바라보던 양치기의 심정도 로제를 마시는 동안 프로방스와 함께 나에게 성큼, 다가왔다.
그렇다. 이런 게 로제다. 미지의 경계 너머에서 시작되어 마음속으로 불어오는 ‘위험한’ 바람 같은 와인 말이다.
와인은 색깔에 따라 레드와인, 화이트와인, 로제와인으로 분류한다. 레드는 적포도로 만들고, 화이트는 청포도 또는 적포도의 과즙만으로 만든다. 그럼 로제는 어떻게 만들까. 사실 로제 양조법에도 여러 방식이 있는데, 여기서는 프로방스 로제 양조법만 소개한다.
프로방스 로제는 그르나슈(Grenache), 생소(Cinsaut), 시라(Syrah), 무흐베드르(Mourvedre) 등의 적포도로 만든다. 포도를 으깬 뒤 압착해 나온 과즙만으로 발효를 하거나, 발효 과정 중 짧은 시간 동안 색과 타닌을 우려낸 뒤 껍질과 과즙을 분리해 만든다. 전자는 껍질과 과즙의 접촉 시간이 적어 옅은 색의 로제를, 후자는 껍질을 우려낸 시간의 정도에 따라 다양한 색깔의 로제를 얻는다. 그래서 프로방스에서는 로제의 색깔을 6단계로 표현한다.
프로방스 로제의 80%는 전자의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흡사 양치기 청년이 스테파네트를 바라보며 느낀 ‘존재의 깊은 곳에서 조금 흔들리는 마음’ 딱 그만큼의 빛깔이리라. 로제는 경계 너머에서 불어오지만 마음을 살짝만 동하게 하는 절제된 바람 같은 와인인 셈이다.
그러니 프로방스 로제의 색깔은 결코 지중해 태양의 정열적인 빛깔을 닮을 수 없다. “가장 여릿여릿하고 가장 반짝이는 별”빛을 닮은 로제의 차분한 그 빛깔은, 외려 창백한 회색에 가까워 그 지방에서는 뱅그리(Vin Gris, 회색빛 와인)라 불린다.
프로방스에 있는 와이너리는 대부분 로제와인을 만든다. 생산하는 와인의 80%를 로제가 차지할 정도라고 한다. 로제 하면 프로방스가 떠오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프로방스 로제는 감미로운 붉은 과일과 열대과일 맛에 약간의 타닌과 산도가 균형을 이루어 상큼하다. 숙성력에 영향을 주는 타닌이 거의 없기 때문에 오래 두고 마시지는 않는다. 1~2년 이내에 양조한 와인을 칠링해 가볍게 마시기에 좋다.
나는 그곳에 가서야 로제의 진미를 알게 됐다. 로제는 화이트와 레드의 성격을 모두 가지고 있어 어느 음식과도 잘 어울렸다. 그래서였을까, 그림 같은 풍경을 잠시 뒷전에 두고 우리 일행은 와인잔과 접시를 모조리 비워 버렸다.
나른함과 포만감 속에서 니스 해변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있으면 세상 부러울 게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와인 탓이었을까? 함께 왔으면 좋았을 누군가가 그리웠고 살며시 기대고도 싶었다. 그날 밤은 잠이 ‘별’처럼 쏟아졌다.
시대의창 대표ㆍ와인 어드바이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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