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래옥, 평양면옥, 을밀대…. 평양냉면이라는 음식을 논하는 자리에서 빠지지 않은 ‘노포’들이다. 그러나 언제까지 오래된 곳들로 운을 뗄 수는 없는 노릇 아닐까. 일부 마니아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던 평양냉면은 남북 정상회담 이후 화제가 되며 대중의 관심거리가 됐다. 이런 최근의 인기를 반영하듯 평양냉면 전문점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그 가운데 이야깃거리가 있는 다섯 곳을 골라 평가(50점 만점)해봤다.
설눈
2018년 남북 정상회담 만찬을 통해 극히 일부만 먹을 수 있었던 ‘진짜’ 평양냉면이 모습을 드러냈는데 파장이 적지 않았다. 그 핵심에는 남한 평양냉면의 정통성을 향한 의구심이 자리 잡고 있다. 한마디로 ‘지금 북한은 이런 걸 평양냉면이라고 먹고 있다는데, 얼핏 눈으로만 봐도 확실히 다른 남한의 평양냉면은 진짜인가?’라는 의문이다. 이런 분위기를 틈타 옥류관이 남한에 진출한다는 등의 이야기가 돌았고, 현재 북한의 평양냉면과 흡사한 음식도 등장했다. 바로 서울 서초동 설눈에서 내는 ‘평양물냉면(1만2,000원)’이다.
그래서 대체 검은색에 가까운, 짙은 회색 면의 정체는 무엇인가? 메뉴 표지의 설명에 의하면 ‘통메밀의 식이섬유와 영양소가 풍부한 메밀껍질을 그대로 제분하여 사용’한 것이다. 메밀 껍질이라, 우리는 이미 그런 면을 한참 먹었었다. 달고 짠 국물에 적셔 먹는 일본식의 ‘모밀’ 말이다. 색이 그럴싸해 보였지만 사실은 밀가루 위주의 면에 태운 메밀껍질 가루를 섞어 흉내만 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말하자면 가짜였다는 것이다. 최근 등장한 평양냉면 전문점은 ‘사실 속메밀, 즉 메밀의 속살은 까맣지 않고 뽀얗다’며 최대한 흰색에 가까운 면을 낸다. 부드럽다 못해 연약하다는 느낌까지 살짝 드는 면은 메밀껍질이 전혀 필요치 않아 보인다. 표정이 거의 없는 국물과 만나면 안타깝게도 기억에 남지 않는 한 그릇의 냉면이 되어 버린다. 현재 남한 평양냉면계의 다양성에 공헌할지, 아니면 정반대로 정통 논란을 불러 일으켜 현존 평양냉면의 운신의 폭을 좁힐지 귀추가 주목되는 냉면이다.
련남면옥
솜씨가 썩 빼어나지 않고 기술적인 완성도가 높지 않지만 맛은 괜찮은 음식이 종종 있다. 련남면옥의 평양냉면(9,000원, 순면 4,000원 추가)이 이 범주에 속한다. 열쇠는 따로 나오는 조개육수가 쥐고 있다. 별도의 용기에 담겨 나오듯 먹는 사람 입맛대로 간을 맞추라는 의도이지만 냉면을 받아 국물을 한 모금 먹어보면 더하기도 전에 알아차릴 수 있다. 맑은 기본 국물은 시원함과 맞물려 그 자체로도 나쁘지는 않지만 무엇보다 감칠맛이 약하다. 조개국물은 간도 맞춰주지만 감칠맛을 더해 국물을 다른 차원으로 끌어 올린다. 물론 온도와는 다른, 조개국물 만의 시원함도 조금 보태니 세 몫을 하는 셈이다.
평양냉면에 조개국물이라니, 누군가는 정통성을 의심할 수 있겠다. 그러나 고명으로 얹은 래디시 한 쪽이 장식미는 물론 아삭함(질감), 알싸함(맛)까지 보태고 있음을 이해한다면 이 모든 설정이 젊은 세대의 ‘현대적으로 해석한 평양냉면’의 범주 안에 안착하고 있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그리하여 풀어진 면과 미지근하고 닝닝한 국물의 몇몇 ‘노포’보다는 차라리 더 의미 있는 한 끼가 될 수 있다. 다만 아주 살짝 덜 익은 듯한 면이나 살코기의 비율로 보아 좀 더 얇게 썰어도 되는, 자른 면이 고르지 않고 들쭉날쭉한 돼지 수육을 보고 또 먹노라면 기술적으로는 다듬을 구석이 아직 꽤 있어 보인다. 굳이 비교하자면 역시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평양냉면인 광화문국밥의 그것과 조금 닮았다
양각도 (윤선희 평양냉면)
양각도는 TV 프로그램 ‘한식대첩’ 세 번째 시즌에서 4위를 차지한 윤선희 셰프가 운영하는 평양냉면집이다. 크라우드펀딩 사이트 와디즈를 통해 인스턴트화 및 판매를 시도한 양각도의 평양냉면(1만1,000원)에서는 가장 먼저 국물의 ‘육향’이 두드러진다. 그런데 육향이란 과연 무엇일까. 평양냉면 4대 노포 가운데 우래옥의 국물을 흔히 ‘육향이 진하다’고들 이야기하는데 두 가지의 가능성이 있다. 진짜 고기가 크게 공헌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다. 그리고 대체로 후자가 조금 더 진하고 표정도 또렷하다. 양각도의 국물도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문제인가? 그렇지는 않다. 사실 고기만 갖고 차가운 국물에 진한 육향을 불어 넣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평양냉면은 사실 화학조미료의 힘을 가장 먼저 빌린 한국 음식이기도 하다.
굳이 짐작하자면 전분을 섞었을 뽀얀 면은 전혀 질기지는 않지만 힘도 좀 있고 가닥끼리 엉기지도 않아서 까슬까슬한 청량감이 돋보인다. 그래서 오히려 진한 육향이 다소 겉도는 느낌이 있지만 마지막에는 백김치가 모든 것을 아울러준다. 단맛이 거의 없고 신맛을 적절히 내는 덕분에 냉면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맛의 여정 전체를 한데 잘 아울러준다. 별개의 영역에서 훌륭한 명태 식해(1만원) 같은 음식을 주문하지 않는다면 고춧가루 한 톨 없이도 거의 웬만한 한국인이 공감할 수 있는 한식의 맛을 자아낸다는 점도 높이 산다.
아바디
어디에선가 먹어본 것 같은데? 처음 가본 곳이었지만 맛이 유난히 익숙했다. 작년에 책 ‘냉면의 품격’을 쓰면서 ‘공인된 노포’, ‘후발 주자’ 등으로 냉면집들을 묶어 정리했는데, 사실은 ‘컨설팅 냉면’이라는 비공식 범주도 있었다. 어느날 홀연히 나타난, 고깃집들에서 흔히 맛볼 수 있는 평양냉면의 맛이었다.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무난함이 미덕인 냉면이랄까. 많은 평양냉면이 세월이나 족보, 즉 이북과의 연관성을 내세우는데 그런 정보를 전혀 내세우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평양냉면과 더불어 육회비빔밥이나, 한 발 더 나아가 벌교 꼬막무침과 비빔밥이 메뉴에 올라있는 걸 보아도 짐작할 수 있으니, 실제로 검색해보면 베트남 음식점 프랜차이즈의 사업체가 운영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대체로 이런 ‘컨설팅 냉면’들은 아주 빼어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수준이 너무 떨어지지도 않는다. 지하철 역 바로 앞에 자리를 잡고 있으니 이래저래 동네의, 특히 가족을 위한 외식 장소로는 제 몫을 할 것 같다.
봉산평양냉면
먹으면서 ‘업그레이드된 진미평양면옥 같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그곳 주방 출신이 차렸다고 한다. 굳이 찾아보지 않더라도, 비교적 맑은 국물과 굵은 축에 속하는 면의 조합으로 짐작이 가능하다. 진미평양면옥은 논현동 평양면옥의 주방에서 30년을 일했다는 이가 독립해 차린 곳이니 결국 그 계보를 이어 받은 냉면이다. 참고로 이곳은 ‘20년 경력’을 내세운다. 말하자면 십 년 빠지는 경력이지만 일단 첫 인상은 두 평양면옥보다 낫다. 무엇보다 국물의 붙임성이 좋고 면도 늘어지는 느낌이 없으니 청량감이 두드러진다.
좀 더 붙임성 좋은 이 국물의 열쇠는 온도가 쥐고 있다. 굳이 줄을 세우자면 평양냉면들 가운데서도 차가운 편인 국물은 온도가 내려갈수록 복잡함이 드러난다. 그 복잡함과 거듭해 먹을수록 드러나는 열무김치 및 무생채 뒤에 깔리는 가벼운 씁쓸함이 맞물리면 그제서야 냉면의 진짜 표정이 드러나는데, 살짝 아쉬울 수도 있지만 굉장히 훌륭한 접객이 어느 정도 갈음해줘 전체의 경험은 굉장히 만족스럽다. 단체복을 입고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로 균형 잡힌 친절함으로 응대하며, 식탁의 상태를 보고 요청하기 전에 반찬을 채워주는 세심함도 좋다.
이용재 음식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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