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오후 국회 본청 모습. 배우한 기자

조선의 정치는 붕당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선조 때 이조전랑(吏曹銓郞)을 둘러싼 동인과 서인의 분열이 붕당 정치의 효시라 할 수 있다. 인조대에 동인에서 분화한 남인과 서인의 공조는 조선의 연합 정치였고, 숙종대의 환국 정치는 왕권 강화를 위해 특정 붕당의 독주를 견제한 고도의 정치공학이었다.

17세기 이후 노론, 소론, 남인, 북인 등 당파적 이해를 앞세운 권력 투쟁 양상을 보였으나, 그 과정에서도 기득권을 배제하고 백성을 위한 정책을 관철하기 위한 사림의 헌신 등 민본 정치의 전통이 관철됐다. 이를 가능케 한 또 하나의 모델은 사헌부ㆍ사간원ㆍ홍문관, 즉 삼사(三司) 중심의 공론 정치였다. 이는 지배세력 내부의 사회적 합의 형성 모델이었고, 임금도 조정의 공론을 거스를 수 없는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었다.

붕당 정치는 서인과 남인, 노론과 소론의 극단적 대립 등 부정적 측면에도 불구하고 왕권과 신권의 세력 균형과 특정 정파의 전횡을 차단하는 등 긍정적 측면이 더 컸다. 이는 정파 간의 비판이 존재하되, 상대를 인정하는 공존의 정치문화가 있기에 가능했다. 결국 붕당 정치는 성리학을 바탕으로 했던 문치국가 조선에서 정치의 동력으로 기능한 특수한 정치 형태였다.

해방 이후 한국 정치는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의 역사적 경험에서 축적된 서구의 정치제도와 미국 모델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일제 잔재는 청산 초기 단계에서 좌절됐고, 미군정에서 친일 세력은 자신의 구명 배경으로 친미를 택하고, 좌우익의 대립과 냉전을 거치는 과정에서 반공주의에 의탁했다. 과거 청산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념 대결 상황에서 공존의 정치문화는 애당초 존재할 수 없었다.

시민의 이익을 표출ㆍ집약하고 시민사회의 갈등을 제도권에 수렴함으로써 정치 안정과 사회적 합의를 창출해 가야 하는 정치의 기능은 현재의 정당체제로서 분명한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수단으로서 주권자를 대의하는 제도로서 기능해야 하지만 선거는 대의제를 빙자한 입신과 출세의 도구로 전락하고 있다. 거대 정당에 의한 독점 카르텔 체제를 지양하자는 사회적 합의가 엄연히 존재함에도 제1 야당은 오히려 비례대표제 자체를 폐지하자는 퇴행적 주장을 서슴지 않는다.

임시국회 소집과 의사일정 합의 여부가 정치적 쟁점이 되는 비정상적 상황에서 국회는 정치를 논할 자격이 없다. 선거가 정치의 모든 것인 양 치부되는 정당 체제에 대한 불신은 급기야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 해산이라는 사실상 실현 불가능한 청원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물론 한국당 해산 청원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지만 숫자는 의미가 없다.

진영 논리를 감안해도 현재의 양대 정당에 의한 독점체제를 혁파하라는 국민 요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다당제의 허울을 쓴 사실상의 양당제, 소수자와 약자의 의견이 과소대표되고 모든 계층을 대변한다면서, 아무도 대표되지 않는 퇴행적 정당체제의 개혁은 선거제도 개편에서 단초를 찾아가야 한다.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상대 존재를 인정하는 관용의 정치문화다.

조선 왕조를 관통했던 공론 정치와 공존의 정치문화는 서구 민주주의의 핵심인 관용과 맞닿아 있다. 이의 전통을 살리면 한국 정당 정치는 새 지평을 열어갈 수 있다. 조선 붕당 정치와 한국 정당 정치를 동일선상에서 대비하기에는 시간과 공간의 차이가 엄존하지만 민주주의 선진국들의 연합 정치와 연정은 공론과 붕당을 통해 정파 간 합의를 모색해 갔던 행태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 정치는 조선의 붕당 정치에서도 배우지 못하고 있다. 붕당 정치에 대한 역사정치학적 연구와 성찰이 정당체제 개혁에 결정적 시사를 줄 수도 있다. 물론 투명한 선정 과정이 전제된 연동형 비례대표제와 국회의원 국민소환제 도입 등의 법적 제도화는 당연한 전제다.

최창렬 용인대 통일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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