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은영의 화해’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오은영 박사가 <한국일보>와 함께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저작권 한국일보]일러스트=김경진기자

저는 취업을 준비하는 20대 남성입니다. 제게는 저를 낳았지만 키워주지 않은 아버지가 있습니다. 어렸을 때에는 여느 가정과 다를 바 없는 화목한 가정이었지만 아버지의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부모님의 사이도 멀어졌습니다. 초등학교 졸업할 무렵 아버지가 집을 나가면서 그때부터 아버지와는 함께 살지 않았습니다. 당장 고졸에 이혼녀로 전락한 어머니는 반지하 방으로 이사했고 저와 제 동생을 키우기 위해 죽도록 고생을 했습니다. 어머니는 아침 일찍 나가 밤늦게 들어왔고, 저와 제 동생, 둘만 집에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컴퓨터 게임만 했어요. 어머니가 힘들게 고생하고 있다는 걸 어렴풋이 느꼈지만, 제가 할 수 있는 건 말썽을 피우지 않는 것뿐이었어요. 어머니는 보증금을 빼서 장사를 했고, 저희는 이모네에 얹혀 살았어요. 중학교에 가면서 저희 가족은 단칸방으로 옮겼고, 어머니 사업이 잘 풀리면서 현재는 아파트에 지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어렵게 지내는 동안 아버지는 단 한 번도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성인이 되고 보니 그런 아버지가 너무 원망스럽고, 화가 납니다. 용서도 안되고요. 어렸을 적에는 강인하고 엄격한 어머니보다 부드럽고 재미있는 아버지가 더 좋았어요. 엄격한 어머니보다 아버지와 같이 살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했습니다. 지금까지도 아버지는 어머니와는 연락하지 않지만, 저와 제 동생은 주기적으로 만나 밥도 먹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쯤에는 아버지가 재혼한 분도 소개받았어요.

그렇다고 아버지가 저희를 돌봐준 건 아닙니다.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어머니가 당시 정부 지원이라도 받으려고 이혼을 요구했지만 그것조차 외면했습니다. 두 분이 이혼한 건 한참 뒤였어요. 물론 아버지도 거액의 빚에 힘들었다는 건 압니다. 하지만 그 이유로 10년 넘게 단 한 번도 자식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주지 않은 데 대해서는 여전히 용서하기가 어렵네요. 다달이 적은 돈이라도 도와주는 게 그렇게까지 부담스러웠을까요. 어머니가 저희 두 남매를 키우려 고졸 여성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 가며 죽을 고생을 하는 동안 아버지는 취미 생활인 악기를 연주하고, 강아지도 키우면서 사셨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빈자리를 뼈저리게 느끼게 한 것은 원망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를 그렇게 고생시키고, 자식들 학비조차 주지 않은 아버지의 그 책임감 없는 행동은 사무치게 원망스럽습니다. 어머니는 너그럽게 이해해야 한다고 하지만 저는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아버지를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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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탓은 아니지만, 저는 제가 하고자 했던 일을 추진하는 데 매번 어려움이 컸습니다. 사진작가가 되려고 했지만 준비하는 게 너무 힘들어 포기했습니다. 게임만 하다가 결국 재수도 실패했습니다. 군대 생활도 단체 생활이나 선임의 집합이 힘들어서 불명예 제대를 했습니다. 호주에도 갔었지만 향수병에 걸려 5개월만에 돌아왔어요. 지금은 어머니 사업이라도 도와드리려 태국어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제껏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도 아버지는 아무것도 해 준 게 없습니다. 그저 잘해 봐라, 열심히 해라는 얘기뿐이었어요. 아버지는 왜 그렇게 무책임한 사람인지 이해도, 용서도 되지 않습니다. 아버지를 향한 저의 분노와 원망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이민호(가명ㆍ25ㆍ취업준비생)

민호씨, 용기 내서 사연을 보내줘서 고마워요. 담담하게 당신 얘기를 했지만 당신의 깊은 괴로움이 느껴집니다. 민호씨, 스물 다섯이라는 나이는요, 청소년에서 초기 성인기를 거쳐가는 그야말로 성인으로서 자기 자신을 고민할 시점이에요. 아버지와의 관계에서도 아들의 위치로만 있다가 가장이나, 남자로서 아버지를 보게 되고요.

제가 보기에 민호씨는 두 가지 깊은 고뇌가 있어요. 하나는 자기 자신에 대한 깊은 고뇌예요. 하고자 했던 일이 번번이 실패한 데 대해 스스로 ‘나는 왜 이 모양일까’라고 깊이 좌절해요. 마냥 10대 철부지가 아니라 이제 남자 성인으로서 뭔가 잘하고 싶고, 이루고 싶은데 그게 잘 안됐어요. 스스로 ‘나는 왜 잘 안될까’ ‘나는 왜 뭐 하나 제대로 해내는 것이 없을까’라고 좌절감이 들어요.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나의 아버지는 어떤 사람일까’라는 고뇌지요. 사연에서 밝혔듯 ‘아버지는 왜 그렇게 무책임한 사람일까요’라는 고민이 당신을 괴롭히고 있어요.

이 두 가지 문제는 결국 하나로 귀결돼요. ‘아버지는 자식인 나한테 왜 그랬을까’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스스로 절망감과 좌절감을 느껴요. ‘아무리 힘들었어도 우리를 챙겨줘야 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며 당신을 괴롭히고, 자책하게 만들어요. ‘내가 얼마나 못났길래 아버지로부터 최소한의 지원이나 사랑을 받지 못했을까’라는 생각까지 미치는 거예요. 돈의 액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돈은 자식에 대한 본능적 사랑과 부모의 기본적인 보호와 책임을 상징적으로 의미하지요.

민호씨의 아버지는 어떤 사람일까요. 냉정하게 말하면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에요. 아버지는 본인의 심신이 편안한 게 중요한 사람이에요. 가끔 자식과 만나 밥 먹고, 웃고 즐겁게 좋은 시간을 보내는 것은 좋지만 자식이 힘들거나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의논하고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아버지는 아니었어요. 부모와 자식은 흔히 희로애락을 함께해요. 자식을 키우면서 부모는 자식이 겪는 고통을 함께하죠. 하지만 당신의 아버지는 20여년간 슬픔, 고통, 어려움은 함께하지 않았어요. 그건 민호씨뿐 아니라 동생이나 엄마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아내를 사랑해서 혹은 자식의 앞날이 걱정되어서 이혼을 안 한 게 아니라, 혹시 ‘내가 귀찮게 뭐 하러 이혼을 해’라고 생각하다가 재혼 상대가 생겨서 필요에 의해 이혼을 한 것일 수도 있어요. 아버지는 온화하고 착한 분인 건 맞는 것 같지만, 착하다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안줄까요.

아버지와 진지한 정서적 교감이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를 만나면 즐거웠을지는 모르나 공허했을 거예요. 학대하는 나쁜 아버지는 아니었지만, 어떤 면에서 보면 이기적이었어요. 그런 아버지를 만난 건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아버지의 그런 특성은 당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당신이 더 잘했더라면 아버지가 당신에게 지원을 해줬을까요. 절대 아닐 겁니다. 어떤 자식이었더라도 당신의 아버지는 그렇게 대했을 거예요. 그러니 당신이 ‘내가 얼마나 못났으면 아버지가 나에게 돈 한푼 안 줬을까’라고 괴로워할 필요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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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무언가를 해 보려다 실패한 상황들이 민호씨의 의식 수준에서는 스스로가 ‘난 왜 이렇게 제대로 한 게 없을까’라고 생각하고, 의식 밑면에서는 아버지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내가 이렇게 못나서 아버지가 안 도와준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고, ‘나는 얼마나 못났길래 남도 아닌 아버지에게 기본적인 사랑(지원)조차 못 받는 것일까’라고 생각하고, 깊은 무의식에서는 ‘아버지에게 ‘나’라는 사람은 상황과 조건과 관계없이 가장 소중하게 대해지는 존재가 아니었구나’라는 내적 갈등이 자리잡았어요. 해결되지 않은 내적 갈등은 일생에 걸쳐 영향을 줍니다. 민호씨의 내면을 어떻게 쉽고 간결하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상징적 표현을 해 본다면 ‘자존감이 매우 낮다’라고 할 수 있어요. 당신의 내적 갈등은 ‘‘나’라는 사람이 존재하는 것으로도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소중한 존재이고 어떤 성과를 이루어 낼 만한 유능한 사람이라고 믿는 마음인 자아 존중감의 형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을 거예요. 자존감이 있는 사람은 이를 통해 자아 정체성을 제대로 형성할 수 있지요. 현재 민호씨는 스스로에 대한 가치에 대한 흔들림, 자신의 유능함에 대한 자신감 상실, 정체성의 혼란 등으로 고통스럽고 아버지에 대해 분노가 치밀지요. 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결국은 민호씨 스스로에 대한 분노인 거지요. 그래서 더 괴로워요.

제 생각에는 당신이 꽤 괜찮은 사람 같아요. 어린 남성이 이렇게 속내를 얘기하고 도움을 청하는 것은 굉장히 쉽지 않은 일이에요. 평소에 생각을 많이 하고, 감정의 깊이가 깊은 사람인 것 같아요. 정말 진솔하고 성실한 사람일 거예요. 그렇다면 분명히 능력도 많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당신에게는 마음 아프지만 채워지지 않은 부분들이 있어요. 살면서 죽도록 고통스러운 순간은 없었을지 몰라도, 작지만 즐거웠던 경험 말이죠. 사람들은 힘들 때 이런 기억으로 어려움을 이겨내요. 그런데 당신은 어렸을 때부터 하루 종일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고, 소통할 사람이 없었어요. 바쁜 어머니를 생각해서 말썽을 피울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뭘 도와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어요. 그저 가만히, 혼자, 외롭게 암울한 시간을 보내온 것 같아요.

또 스스로 성공한 경험이 많지 않은 것도 채워져야 하는 부족한 면이에요. 능력이 부족한 건 아닌데 매번 실패를 경험하면서 당신 스스로 좌절해요. 아무리 능력이 많아도 어떤 일을 하다 보면 생각했던 계획과 틀어지거나 편차가 벌어지기 마련이에요. 그런데 당신은 처음부터 목표를 정해서 가다가 진행과정에서 그 편차가 조금이라도 벌어지면 뒤로 확 물러나 포기해요. 그러고 ‘아 홀가분하다’라는 생각보다 ‘아 나는 왜 못하지’라고 생각하고 크게 좌절해요. 그럴 때 함께 의논해주고, 위로해주는 부모의 도움을 받지 못한 민호씨는 이 결핍을 무의식적으로 우뚝 성공해서 극복하려고 했을 수도 있어요. 그러다 보니 목표가 높아지고, 거기에 도달하지 못하는 상황이 생기면 뒤로 나동그라지고 힘을 잃고 포기하게 되고 당신은 슬퍼지고 낮은 자존감은 더 바닥으로 내려가겠지요. 이 모든 과정은 당신을 괴롭게 하지요.

제가 민호씨에게 해주고 싶은 얘기는, 민호씨 나이는 실패도 해보고, 시행착오를 하는 게 너무나 당연하다는 거예요. 잘하고 싶었겠지만 방향이 벗어나거나, 민호씨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편차가 큰 상황이 오는 것에 너무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두려운 마음이 결국 당신을 뒤로 나동그라지게 하고 포기하게 만든다는 사실도 잘 알아차렸으면 좋겠어요. ‘까짓것 죽기보다 더 하겠어’라는 마음으로 실패와 좌절을 잘 극복해 나가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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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을 다했다고 결과가 늘 좋은 건 아니에요. 이런 어려움을 삶에서 이겨내는 힘은 정말 가깝고도 소중한 관계에서 주고받은 즐겁고 행복한 추억에 있어요. 당신에게 부족한 이 기억을 지금부터라도 만들어 가도록 해 보세요. 당신에게는 당신을 지켜준 멋지고 훌륭한 어머니가 있고, 함께 자라온 동생이 있어요. 이들과 아주 소소한 행복과 추억을 만들어 보기를 권합니다. 영화도 보고, 맛있는 식사도 하고, 요리도 하고, 사진도 찍고 그런 일상의 사소한 기쁨과 유쾌한 경험을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해 보기를 바랄게요. 그리고 당신이 힘들거나, 도움이 필요할 때 아버지 대신 당신을 헌신적으로 키운 어머니와 의논하세요. 가장 가까운 사람과 대화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생겨요. 그러다 보면 당신이 앞으로 성숙한 남자가 되고, 아버지가 됐을 때 당신의 아버지와는 다른 길을 걷게 될 겁니다.

정리=강지원 기자 styl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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