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이 71번 광수” 주장도… 명예훼손에도 처벌 안 받아
286 광수 지목된 탈북 김정아씨 “1980년이면 겨우 4세였다”
지만원씨가 김진태ㆍ이종명 자유한국당 의원 주최 공청회 등에서 배포한 책자에 광주 시민들과 북한 내부인사들이 무작위로 동일 인물이라고 표시돼 놓았다.

‘광주사태는 소수의 좌익과 북한에서 파견한 특수부대원들이 순수한 군중들을 선동하여 일으킨 폭동이다.’ 5ㆍ18민주화운동의 대표적인 음모론인 북한군 개입설은 2002년 군인출신 극우논객 지만원씨가 동아일보에 광고를 게재해 주장하며 본격화됐다. 지씨 주장의 핵심은 ‘5·18은 600여명의 북한 특수부대가 광주에 침투해 시위를 지휘한 사건이었고, 광주 시민들은 독자적인 시위대를 구성한 사실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과거 6차례 이뤄진 5ㆍ18민주화운동 대한 국가적 조사에서 북한군이 침투했다는 증거나 정황은 한 번도 드러난 적이 없었다. 2007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결과 보고서에 따르면 신군부는 5ㆍ18민주화운동 기간 동안 ‘북 공작원 독침사건’을 조작하는 등 시민군을 북한과 연계시키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그 어떤 북한군의 침투는 물론 북한과의 연계의혹을 밝혀내지 못했다.

지씨의 주장은 즉각 5ㆍ18민주화운동 단체들의 거센 분노를 불렀다. 2002년 동아일보 광고 관련 5·18기념재단 이사장 등 607명은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지씨를 고소했고, 1심 재판부는 지씨가 대선을 앞두고 정치적 목적으로 사실을 왜곡했다며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한 후 대법원이 이를 확정했다. 지씨는 이후에도 ‘김대중 전 대통령이 김일성과 짜고 북한 특수군을 광주로 보냈다’는 허위주장을 한 혐의(사자 명예훼손)로 기소돼 2013년 1심에서는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 항소심에서는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 판결을 받고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지난 2월 8일 김진태ㆍ이종명 자유한국당 의원이 주최한 공청회 단상에 올라 5ㆍ18 북한 개입설을 퍼뜨린 지만원씨. 연합뉴스
◇2012년 명예훼손 무죄판결 후 ‘광수’로 날조 구체화

두 차례의 유죄판결에도 불구하고 2012년 말 지씨의 명예훼손 혐의에 대한 법원의 최종 무죄 판결은 5ㆍ18민주화운동에 대한 극우세력의 왜곡과 날조에 불을 붙였다. 2011년 1월 수원지법 안양지원은 5ㆍ18민주화운동을 왜곡·비방하는 게시글을 인터넷에 올린 혐의로 기소된 지씨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지씨가 5ㆍ18민주화운동을 왜곡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구체적인 피해자가 특정되지 않았으며 5ㆍ18민주화운동은 법적·역사적 평가가 확립됐기 때문에 지씨의 게시글을 통해 5·18 관련자에 대한 사회적 평가가 근본적으로 바뀔 수 있다고 보기 어렵다며 면죄부를 줬다. 대법원은 이를 확정했다.

이후 지씨는 ‘600여명 북한 특수군’에 대한 구체적인 날조를 본격화했다. 그는 5ㆍ18민주화운동 당시 사진 기록에서 수집한 인물들과 닮은꼴의 북한 인물들의 사진을 나란히 놓고 동일 인물이라고 주장했다. 또 사진 속 광주시민들에게 일련 번호를 매기고 ‘○○번 광수’라고 이름 붙였다. ‘광수’는 ‘5·18 당시 광주에서 활동한 북한 특수부대’라는 의미로 지씨 등이 줄여서 부르는 시민군에 대한 멸칭이다. 일간베스트 등 극우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도 지씨의 주장이 광범위하게 퍼지며 이를 재생산하기도 했다. 북한에서 노동당 비서를 지내고 1997년 남한으로 망명한 황장엽씨 역시 지씨에 의해 ‘71번 광수’로 지목됐으나, 해당 사진은 당시 시민군 상황실장을 맡았던 박남선씨로 밝혀졌다. ‘286 광수’로 내몰린 김정아 통일맘연합회 대표는 “1980년 나는 북한에 사는 4살 소녀였다”고 황당해 하기도 했다.

지만원 씨에 의해 광주에 침투한 북한 특수부대원으로 지목된 탈북민 김정아씨가 지난 1월 10일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김씨는 “5ㆍ18 때 4살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오대근 기자
◇‘광수’지목된 광주시민과 탈북민들도 지씨 고소

이러한 날조에는 일부 탈북민들도 가세했고, 일부 언론은 이를 퍼뜨렸다. 2013년 5월 종합편성채널 채널A는 1980년 5월 광주에 침투했던 북한 특수군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김명국(가명)씨의 인터뷰를 방송했다. 뒷모습과 목소리만 나온 김씨는 “광주 폭동에 참가했던 조장, 부조장들은 군단 사령관이 됐다”고 주장했다. 채널A는 거센 비판을 받고 사과방송을 했으며,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프로그램 관계자 징계 및 경고’ 조치를 내렸다. 김씨는 명예훼손으로 고발됐으나 “허위사실을 유포했어도 피해자가 특정되지 않는다”고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그는 이후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지씨와 같은 극우 논객뿐만 아니라 5ㆍ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지휘관들도 왜곡에 동조하고 있다. 2014년부터 매년 5월 18일 국립현충원에서는 지씨가 집행위원장인 5·18군경전사자추모회 주최로 추모식이 열리는데, 지씨는 이곳에서도 북한군 개입설과 ‘광수’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설파한다. 5·18군경전사자추모회는 당시 특전사령관이었던 정호용 전 국방부장관, 박희도 전 육군참모총장 등 계엄군 핵심인물들이 공동회장을 맡으며 행사에 직접 참석하기도 한다.

지씨가 북한군 개입설을 주장한 지 17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광주단체들은 지씨를 상대로 최소 6건 이상의 소송을 진행 중이다. 최근에는 지씨에 의해 ‘광수’라고 지칭된 당시 광주시민 14명이 지씨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 공판이 진행되고 있다. 올해 1월에는 지씨에 의해 ‘탈북 광수’로 지목된 탈북민 11명이 명예훼손 등의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지씨를 고소하면서 고소 대열에 합류했다.

박소영기자 sosyou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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