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 청와대를 출입하는 동안 나의 숙제는 ‘박심’, 즉 박근혜 전 대통령의 마음을 읽는 것이었다. 읽는다기보다 넘겨짚는 것에 가까웠지만. 박심은 기묘했다. 박 전 대통령의 말은 어렵지 않은데도 난해했고, 행동은 심오한 건지 이상한 건지 헷갈렸다. 그의 눈빛이, 때로는 말 없음이 온 나라를 들었다 놨다.
박심이 사실은 최순실의 ‘최심’이었다는 죄목으로 박 전 대통령은 탄핵돼 감옥에 갔다. 박심에 미래를 걸었던 사람들의 세계가 와르르 무너졌다. 내가 애써 연마한 박심 독법도 무용지물이 됐다. 박심은 그렇게 죽은 말이 돼 사라질 줄 알았다. 100년쯤 지나 사극에나 나오겠다 싶었다.
박심이 2019년의 정치 한복판으로 돌아왔다. ‘의리의 친박’을 자처하는 홍문종ㆍ조원진 의원이 박심을 불러들였다. 홍 의원은 얼마 전 자유한국당을 탈당해 태극기 부대의 자칭 수호자인 조 의원과 손을 잡았다. 둘은 ‘박근혜신당’을 만들어 내년 4월 총선을 치를 것이라고 한다. 신당 이름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63년 창당한 ‘공화당’에 살을 붙여 짓는다니, ‘박 패밀리’가 세트로 선거에 소환될 판이다. “21대 총선은 박근혜와 문재인의 싸움이 될 것으로 예상한다.”(홍 의원) 박 전 대통령이 애용한 표현을 빌리면 ‘창조 선거’가 아닐 수 없다.
전성기 시절의 박심은 ‘공포’로 작동했다. 전력을 모르는 적(敵), 대답 없는 신(神)이 더 두려운 원리였다. 바라는 게 많은 사람일수록 미지의 박심 앞에서 벌벌 떨었다. 노련한 홍ㆍ조 의원은 박심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법을 꿰뚫고 있는 듯 하다. 박심과의 교감 여부를 후련하게 밝히지 않은 채 ‘냄새’를 열심히 풍기는 것이다. “박 전 대통령과의 접촉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지금 영어의 몸이기 때문에 여러 부담을 줄 수 있어 공개적으로 뭐라 말하기 힘들다.”(홍 의원)
박근혜신당은 승산이 없지 않다. 한국당에 안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표, ‘불법 탄핵 세력’에 복수하고자 하는 표가 신당 행을 잴 것이다. 총선 전에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도입되면 신당은 더 유리해진다. 투옥 이후 박 전 대통령이 유일하게 곁을 준다는 유영하 변호사가 신당에 합류해 쐐기를 박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 선거 때 전국을 다니며 ‘붕대 투혼’을 했던 박 전 대통령이 집 아니면 구치소에서 ‘부재중 투혼’을 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홍ㆍ조 의원은 “태극기 세력을 중심으로 한 정계 개편”을 선언했다. 태극기 부대의 염원은 ‘박근혜 구출’이다. 두 의원이 구출하려는 것도 박 전 대통령일까. 아니면 정계 강퇴 수순에 몰린 자신들의 처지일까. 무엇보다, 신당 창당이 정말로 박심일까. 박 전 대통령을 보좌했던 인사는 이렇게 말했다. “박심의 실체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박심을 유 변호사가 알겠는가, 대통령 본인이라고 똑 부러지게 알겠는가. ‘박’이라는 한 글자가 보수 진영에 어른거리는 것만으로도 위력적이라는 게 핵심이다. 박 전 대통령에게 정치 본능이 남아 있다면 침묵함으로써 상황을 이용할 가능성도 있다.”
한국당은 참 딱하게 됐다. 박심을 뭉개자니 태극기 세력이 걸리고, 박심 소유권을 놓고 뒤늦게 신당파와 싸우자니 중도 표와 영영 이별이다. 누구를 탓할 수도 없다. 박심을 정리하지 못한 것이 한국당 스스로이기 때문이다. 박심은 탄핵 이후 줄곧 한국당을 맴돌고 있다. 박심은 돌아온 게 아니라 그냥 거기 있었다. ‘포스트 박’이 되겠다는 리더들이 수권 능력을 보여주지 못한 탓이다.
감옥에 있는 옛 지도자의 그림자에 움찔하는 것, 대한민국 제1 야당의 허약한 실체다. 요즘 한국당 행보를 보면 뾰족한 수가 없는 것 같다. 박 전 대통령이 그랬듯 “온 우주가 나서서 도와주기를” 바랄 수밖에.
최문선 정치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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