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과 입을 그리면 얼굴이 된다.(코는 필수가 아니다) 얼굴을 가지면 새로운 존재가 된다. 1,000년도 넘게 돌멩이였던 돌멩이가 반짝, 눈을 뜨고 나를 본다. 싱긋, 웃기까지 한다. 나도 돌멩이를 따라 웃으니 돌멩이는 더 이상 돌멩이가 아니다.
겨울이면 식탁이나 책상에 두 서넛씩 굴러다니는 귤을 가만 바라본다. 눈과 입(여기서도 코는 필수가 아니다)을 그리는 선의 형태, 길이, 각도, 굵기의 미세한 차이에 따라 웃는 귤, 화난 귤, 찡그린 귤, 놀리는 귤, 슬픈 귤이 된다. 귤 가족이 나를 쳐다본다. 너희는 별안간 어디서 왔니? 대체 너희를 어떡하면 좋으니?
얼굴이 존재다.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이란 옛날 노래 가사가 말하듯. 멀리 있는 이를 그리워할 때 무얼 먼저 떠올리나? 발? 어깨? 머리카락? 팔꿈치? 페티시즘이 있지 않은 다음에야. 그의 손도 발도 몹시 보고 싶겠지만 보고 싶은 건 바로 그다. 그리고 그는 얼굴로 떠오른다. 손발이 아니라.
인간이 식물보다 동물을 더 가까이 느끼는 이유는 혹시 동물에게 얼굴이 있기 때문 아닐까. 깜깜한 밤에 노란 눈을 켜는 고양이도, 재채기 하는 개도, 식탁에 매운탕으로 올라온 생선도, 해바라기 씨앗을 까먹는 햄스터도 나와 똑같은 눈, 코, 입, 귀를 가졌다. 세계를 감각하는 기관들로 나는 너를 감각한다. 나를 감각하고 있는 너를.
“꽃나무는 가지마다/천 개의 눈을 가졌어요.//그 눈 반짝 뜨면/그대로 꽃이죠.”(김희정, ‘꽃눈’ 전문, 아동문학평론 2015 겨울호)
이런, 식물에게도 얼굴이 있단다. 어쩌면 시인은 세상 모든 존재에게서 얼굴을 발견하는 이들. 나를 감각하는 무수한 너를 감각할 수 있는 얼굴을 지닌 이들.
김유진 어린이문학평론가ㆍ동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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