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유럽 순방 중인 문재인 대통령이 14일 오전(현지시간) 스웨덴 스톡홀름 왕궁에서 기자단에게 인사말을 마친 후 칼 구스타프 16세 국왕과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1945년 8월 6일 미국은 우라늄 원자폭탄 ‘꼬마’를 일본 히로시마에, 8월 9일 플루토늄 원자폭탄 ‘뚱보’를 나가사키에 투하했다. 당혹의 괴이라 할 만한 이름을 가진 대량살상무기의 인체실험이었다. 이 참사 직후, 스웨덴 정부는 국방연구소(FOA)에 핵무기 제조 가능성을 의뢰했다. 전쟁이 국가를 만들고 국가가 전쟁을 만들었다는 역사사회학자의 주장을 넘어 국가 본성의 실재를 묻게 한다.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이 실현되기 전인 2차대전 기간 동안 스웨덴은 핵 에너지의 미래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우라늄이 함유된 흑색 셰일의 매장량도 이 이해관계에 한몫했다. 1941년 설립된 전투적 명칭의 군사물리학연구소는 국방연구소의 전신 가운데 하나였다. 1945년부터 1968년 핵확산금지조약(NPT)에 서명하기 전까지 스웨덴은 핵무기 개발을 행동으로 옮겼다.

제국주의 국가라는 전력은 있지만 미국적 기준의 이른바 깡패국가처럼 보이지는 않았던 복지국가를 지향하던 스웨덴이 왜 핵무기를 만들려 했을까, 물을 수밖에 없다. 1945년은 스웨덴이 적으로 간주하고 있던 소련의 핵실험 이전이었다. 소련은 1949년 8월 핵실험을 했다. 1945년은 스웨덴에서 핵무기 공포가 매력이 되는 역설의 순간이었다. 가능한 핵공격으로부터의 보호가 스웨덴 핵 개발의 목적이었다. 10여년 동안 스웨덴은 이 질문을 봉쇄했다. 1945년부터 1954년까지 핵무기 개발은 비밀이었다. 1945년 11월 원자력위원회란 자문위원회가 만들어졌을 때, 군은 주요 구성원이었고, 핵무기 만들기는 그 위원회의 주요 의제였다. 1950년대 중반 국방연구소의 3분의 1의 인력이 핵무기 관련 업무를 했다.

냉전시대 스웨덴은 국가 주도로 과학기술에 대한 투자를 축으로 근대화와 중립화의 신화를 만들어 갔다. 군산복합체는 두 신화를 매개하는 역할을 했다. 1949년 미국 주도의 북대서양조약기구에 참여하지 않은 것도 중립 원칙에 근거한 결정이었다. 스웨덴은 1950년 3월 세계평화대회 상설위원회가 핵무기의 무조건적 금지와 핵무기의 국제적 통제, 그리고 핵무기를 선제 사용하는 정부를 전범으로 간주하겠다는 내용을 담은 스톡홀름 호소문과 그 문건의 서명운동을 전개할 때, 상징적 공간이었다. 결국 복지국가 스웨덴은 중립이라는 신화의 우산 아래서 국제관계의 사회민주주의적 개혁을 모색하는 외교정책을 전개하는 동시에 핵 개발을 했다. 1954년 스웨덴은 핵무기 보유를 선호하는 보고서를 통해 핵 개발을 공개했다. 미국이 수소폭탄 실험을 한 직후 처음으로 스웨덴 의회에서 핵무기에 관한 논쟁을 했다. 중립국가의 행동의 자유는 핵 개발을 정당화하는 담론이었다. 1955년경 스웨덴은 핵무기를 생산할 수 있는 잠재적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스웨덴은 핵 국가가 되지 못했다. 첫째, 평화지향적 대중의 저항이었다. 핵무기에 반대하는 시민운동은 핵 국가 스웨덴에 반대했다. 북한식 비유를 달면 핵ᆞ복지 병진노선을 걷던 스웨덴 사회민주당은 복지 지출을 줄일 수밖에 없는 군사적 자립의 욕망에서 탈출했다. 둘째, 미국의 개입이었다. 원폭 투하 직전에도 스웨덴은 핵무기 원료인 우라늄의 수출입 통제에 관한 논의를 미국과 했다. 1956년 스웨덴은 스웨덴노선으로 알려진 천연 우라늄을 사용할 수 있는 중수로 원자력 발전을 선택했다. 그러나 결국 미국과 원자력 발전을 포함한 군사협력이 진행되면서 핵 국가 스웨덴이 불가능해졌다. 중립을 표방한 스웨덴이 미국과 사실상의 동맹을 체결하는 방식으로 핵포기를 했다는 주장이 있을 정도다. 셋째, 스웨덴은 비핵 지대 건설과 핵군축을 통해 평화의 길을 가고자 했다. 핵 국가의 핵 군축, 핵 무기의 비확산, 핵 에너지의 평화적 이용을 규범으로 하는 다자 기구인 핵확산금지조약에 서명하며 스웨덴은 비핵 국가 선언을 했다.

구갑우 북한대학원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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