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니얼 밸리] <2> ‘열린 커뮤니티’가 젊은 스타트업 열정 키운다
10년 전 신입생이 설립… 공유스쿠터 라임 등 700개 기업 산실
지난달 14일 방문한 미 캘리포니아주 팔로알토시 하노버가 2627번지. 좁은 골목을 따라 걷자 미 스탠퍼드대학교 창업지원기관 스타트엑스(StartX)의 입구가 보인다. 팔로알토=신혜정 기자.
※편집자 주: 밀레니얼 세대가 미국 경제의 핵심지 실리콘밸리의 주인공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들이 창업과투자, 소비와 문화활동의 중심 세대로 자리 잡은 실리콘밸리는 이제 ‘밀레니얼 밸리’라 불려도 지나치지 않다. 지난 2~5월까지 4개월 동안 샌프란시스코 일대의 스타트업과 스탠퍼드대ㆍ버클리대의 창업지원 기관 등에서 취재한 ‘밀레니얼 밸리’ 현장의 이야기를 매주 목요일 7회에 걸쳐 연재한다.

“여기가 정말 스타트엑스(StartX) 맞나요?” “네, 잘 찾아오셨어요. 들어오세요.”

현관 앞 책상에 앉아있던 남학생이 직접 문을 열어 주며 반겼지만 여전히 미심쩍었다. 지난달 14일 방문한 미국 실리콘밸리의 중심지인 캘리포니아주 팔로알토시 하노버가 2627번지. 스탠퍼드 대의 대표 창업지원기관이 있다는 이 주소로 찾아왔건만, 좁은 골목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니 보이는 건 큼직한 공유주방과 노트북만 쳐다보는 학생 몇 명뿐이었다. 엉성한 솜씨로 벽에 적은 ‘스타트엑스’라는 글씨가 아니었다면 뒷걸음질 칠 뻔했다.

지난달 14일 방문한 미 스탠퍼드대학교 창업지원기관 스타트엑스(StartX) 로비 전경. 팔로알토=신혜정 기자

공간의 진가는 거실을 지나서야 드러났다. 굳게 닫힌 연구실 문을 열자 빼곡히 쌓인 실험도구 사이에 10여명의 청년이 분주하다. 누군가는 가만히 서서 실험용액을 흔드는가 하면, 모니터 여러 개를 보며 실험결과를 비교하느라 정신이 없는 청년도 보인다. 얼핏 봐선 대학 실험실과 다를 바 없지만, 다들 자기 스타트업의 원천기술을 실험하느라 바쁜 창업가들이다. 계단을 오르니 줄지어 놓인 책상과 회의실에서 머리를 맞대고 토론하는 창업팀들도 보인다. 2층짜리 작은 건물에 창업에 필요한 시설이 알차게 모였다.

지난달 14일 방문한 미 스탠퍼드대 창업지원기관 스타트엑스(StartX)의 실험실에서 스타트업 임프리메드(Imprimed)의 임성원(오른쪽) 대표와 동료들이 실험을 하고 있다. 팔로알토=신혜정 기자
◇학생이 직접 스타트업 평가ㆍ투자

소박한 외관과 달리 스타트엑스는 스탠퍼드대는 물론 실리콘밸리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유명한 초기창업지원기관(액셀러레이터ㆍAccelerator) 중 하나다. 이곳은 ‘학생에 의한, 학생을 위한’ 작은 동아리로 시작해 2018년 현재 미국 내 액셀러레이터 순위 2위로 성장(미 라이스대ㆍ메사추세츠공대ㆍ리치몬드대 공동조사)했다.

이곳에서 투자받는 창업자들은 대부분 스탠퍼드대에 재학중인 학생이거나 학교를 갓 졸업한 동문이다. 그러나 스타트엑스가 특별한 점은 창업가뿐 아니라 이들을 발굴, 투자, 육성하는 것도 모두 청년이 한다는 데 있다. 창업 공간을 관리하고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직원들은 물론, 창업 멘토조차 그저 조금 더 일찍 창업에 뛰어든 학생이다. 대학이 아니라 학생이 시작하고 일궈 낸 창업지원기관은 미국에서도 스타트엑스가 최초다.

스타트엑스의 시작은 2009년 설립자인 캐머런 테텔만(29)의 신입생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테텔만은 레슬링 연습 중 크게 다쳐 병원 신세를 지게 됐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에센셜카드’라는 스타트업을 시작하는 등 열정이 넘치던 그에게 쉬는 건 여간 지루한 게 아니었다. 테텔만은스타트업의 성공 요인을 찾겠다며 성공하거나 실패한 경험이 있는 동문 창업가 200명을 인터뷰했다. 그리고 뜻밖의 진리를 발견했다.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건 번뜩이는 아이디어도, 충분한 자금도 아닌 ‘지지자’라는 것. 실패해도 응원해 주는 동료가 있던 사람이 다시 일어나 도전했다는 사실이다.

테텔만은 자연스레 학생끼리의 자조 공동체를 떠올렸다. 기숙사방에서 각자 외롭게 창업하던 친구들을 한데 모으자는 계획이었다. 그렇게 2011년 스타트엑스가 출범했지만 처음엔 그저 돈 없고 꿈 많은 동아리였다. 테텔만은 발로 뛰었다. 성공한 동문을 찾아가 강연을 부탁했고 아마존 같은 대기업과 벤처투자자들, 장학재단을 찾아가 기금을 마련했다. 2013년 대학과 협력해 ‘스탠퍼드-스타트엑스기금’을 조성하면서 날개가 달렸다.

그동안 스타트엑스에는 700개의 기업이 거쳐 갔고 84%가 살아남았다. 이들 기업이 투자받은 액수는 총 190억달러(약 22조5,000억원)에 달한다. 구글, 애플 등에 인수된 곳도 20여곳. 공유스쿠터로 유명한 라임(LIME), 지난해 주식시장에 상장된 생명공학기업 코디악도 이곳 출신이다. 이런 성공을 예상했냐고 물었더니 테텔만은 망설임 없이 “당연하지!”라고 답했다.

미 스탠퍼드대 창업지원기관 스타트엑스(StartX)에서 설립자 캐머런 테텔만이 강연을 하고 있다. 스타트엑스 제공
◇”성공 가능성보다 공동체에 긍정적 기여할지 중시”

하지만 실리콘밸리는 내로라하는 창업지원기관이 즐비한 곳이다. 스타트엑스의 창업 프로그램에 선정되면 소정의 창업지원금과 경영ㆍ법률자문을 한다지만 그 정도는 어디서나 기본이다. 오히려 스타트엑스는 공유오피스 책상 한 칸에 약 400달러의 사용료를 받고 있다. 다른 창업지원기관들은 공짜 사무실을 지원하는데다 창업가 출신 유명 투자자들에게 직접 멘토링을 받기도 하니 그쪽 문을 두드리는 게 남는 장사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스탠퍼드 입학보다 스타트엑스에 합류하는 게 더 어렵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로 청년 창업가들이 이곳에 몰리는 이유는 뭘까?

라이언 맥아더(34) 혁신담당 매니저는 △벤처투자 시 지분을 요구하지 않는 것과 △창업가들끼리의 강한 공동체 정신을 비결로 꼽았다. “우리는 스스로를 ‘액셀러레이터’가 아닌 공동체라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다른 투자자들처럼 투자의 대가로 지분을 가져가거나 경영에 관여하지 않죠.” 투자ㆍ보육할 스타트업을 선발하는 기준도 남다르다. “가장 먼저 보는 것은 팀원 개개인이 가진 역량입니다. 공동체에 긍정적인 기여를 할 사람이 필요하거든요. 그들의 사업 아이템이 성공할지는 다음 문제입니다.”

2017년부터 합류한 반려동물 헬스테크 스타트업 ‘임프리메드’의 임성원(36) 대표도 공동체의 중요성을 체감했다고 한다. 그도 창업 초기엔 페어(PEAR) 등 유명 투자기관의 지원과 멘토링을 받았다. 하지만 자신보다 한 발짝 앞서간 동료 창업가의 경험담과 조언을 듣는 건 이곳에서만 가능했다고 한다. “스타트엑스가 지정해 준 멘토는 우리보다 불과 3년 먼저 창업한 기업이지만 그만큼 우리 고민을 잘 이해하고 생생한 조언을 해 줍니다. 멘토-멘티 관계라지만 사실 같이 성장하고 있는 셈이죠.” 임 대표는 궁금한 점이 있을 때마다 이곳을 거쳐간 선배 기업가들에게 직접 메일을 보낸다고 한다. 그러면 비록 얼굴 한번 보지 않은 사이라도 제 일처럼 나서서 조언을 해 줬다고 설명했다. 선배 창업가의 조언을 받아 성장했으니 그만큼 후배 창업가를 돕는 선순환이 이루어진다.

스타트엑스는 최근 중대 발표를 했다. 스탠퍼드-스타트엑스기금 운영을 이달 30일부터 중단한다는 것. 공동체의 성장으로 재정적 독립이 가능할 정도의 기금이 마련됐고, 대학으로부터의 재정지원을 받지 않고 독립적 창업기관으로 우뚝 서겠다는 선언이다. 한 학생의 열정에서 시작한 젊은 창업 생태계는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다.

팰로앨토=신혜정 기자 aret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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