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시 휴먼북 도서관에 등록된 신(新)중년들
“인생 2막? 더 생각하고, 더 움직여야 하는 것 아닌가요?” 박재봉(66)씨는 웃으며 말했다. 그는 지난 13일 오전 경남 밀양시 삼랑진 부근의 낙동강 주변에서 드론을 띄웠다. “부웅~부웅~”하는 소리와 함께 드론이 날렵하게 공중으로 날아 오른다. 박씨는 지난 4월부터 부산시드론안전관리단 소속으로 활동 중이다. 드론은 강 상공을 이리저리 날아다녔고, 박씨는 지상에서 드론이 찍어 보내는 화면을 통해 강의 상태를 살폈다. 박씨는 “월ㆍ화ㆍ목요일에 낙동강 강변을 찾아 드론 감시반 동료들과 함께 기름띠가 있는지, 녹조가 발생한 건 아닌지 등 강의 상태를 확인한다”고 말했다. 이상이 있으면 즉시 낙동강관리본부로 연락을 한다.
박씨는 드론안전관리단의 자원봉사자인 동시에 ‘인간 책’이다. 그는 ‘부산시 휴먼북 도서관’에 ‘인간 책’으로 등록돼 있다.
◇’인간 책’, 부산시 휴먼북 도서관
박씨처럼 스스로 책이 돼 인생 2막의 프롤로그를 써내려 가는 신(新) 중년들이 있다. 은퇴 후 자신의 지난 삶을 정리하며 책을 펴내기도 하지만 이들은 ‘인간 책, 휴먼 북’이 됐다. 부산시에서 운영하는 ‘휴먼북 도서관’을 통해서다.
‘부산시 휴먼북 도서관’은 어떤 분야에 관련 지식을 가진 사람이 독자와 일대일로 만나 정보를 전해주는 도서관이다. 종이로 된 책을 빌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인 책을 빌려 경험과 지식을 배우는 신개념 도서관이다. ‘리빙 라이브러리(Living Library)’라는 명칭으로 시작된 이벤트로 덴마크 출신의 사회운동가 로니 에버겔이 2000년 덴마크에서 열린 뮤직 페스티벌에서 창안했고, 유럽에서 시작돼 빠른 속도로 전 세계로 퍼져 나가고 있다. 부산시는 2018년 5월 도입했다.
독자들은 홈페이지를 통해 카테고리별 휴먼북 목록을 조회하고, 읽고 싶은 휴먼북에 열람 신청을 하면 휴먼북과 마주 앉아 자유로운 대화를 나누면서 종이 책에서 느낄 수 없는 저자의 생생한 이야기와 경험, 생각 등을 직접 들을 수 있다. 의학이나 법률, IT, 사회운동, 생활달인, 교육, 사회과학, 문화예술 등 분야도 다양하다. 궁금한 점을 바로 물어볼 수 있다는 것도 휴먼북 도서관의 매력이다. 만 50~69세 이하의 ‘신중년’들이 참여하고 있다.
◇인생 2막은 함께 나누면서 행복해 지는 것
박씨는 40년 가량을 중ㆍ고등학교에 근무하다 2015년 교장으로 정년 퇴임했다. 그는 퇴임 후 ‘보람을 느끼고 즐겁게 건강한 생활을 하는 인생 2막’을 고민했다. 그러던 중 ‘휴먼북’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박씨는 자신이 경험과 지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 줄 수 있는 ‘휴먼북’이 되기로 결심했다. 젊었을 때부터 취미 생활이었던 사진, 재작년 전문가 과정을 수료한 드론, 인도 총영사관과의 인연, 부산시교육청에서 직업교육 담당 장학사의 근무 경험. 모두가 ‘휴먼북’으로 태어났다. 박씨는 현재 ‘사진과 함께 한 행복한 생활’, ‘드론 조종 및 드론사진 촬영’, ‘인도 문화의 이해’, ‘진로지도를 통한 행복한 미래를 찾아’ 등 모두 4권의 ‘휴먼북’을 운영 중이다. 그는 “일반적인 종이 책의 정적인 장면이나 작가의 글로는 관련 분야의 내용을 100% 이해하기가 쉽지 않지만 ‘휴먼북’은 직접 만나서 하는 것이기에 훨씬 이해에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박씨는 4권의 휴먼북을 통해 만난 독자들을 직접 만난다. 사진을 잘 찍고 싶은 독자는 박씨를 만나 사진 찍는 법을 배운다. 박씨는 각종 공모전에 50회 이상 수상 경력이 있는 사진 작가다. 그는 “카메라가 없을 때는 휴대전화로 사진을 잘 찍는 방법을 가르쳐 주고, 드론을 사서 오면 직접 야외로 데려 가서 함께 띄워 보기도 한다”고 말했다. 인도 문화가 궁금하면 인도 문화에 대한 설명도하지만 인도문화원이나 영사관 관계자를 직접 소개해 주기도 했다. 휴먼북 활동이 아니더라도 도움이 필요한 곳이 있으면 언제든지 달려간다. 드론을 이용해 전경 사진을 찍고 싶어하는 학교가 무료로 가서 찍어주고, 인도 정통 요가 강사와 인도 관련 문화 행사 등도 소개하기도 했다.
그는 “인생 2막을 살면서 봉사라고 하면 거창하게 보이지만 사실 내가 조금 많이 알고 있는 것을 함께 나누면서 서로가 즐겁고 행복하면 그게 또 다른 개념의 봉사가 아닐까 생각한다”고 했다. 요청이 있으면 무료로 다양한 강의에 응하기도 한다는 그는 매일이 바쁘다. 아직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 아내가 잠에서 깰 까봐 새벽에 나갈 때는 까치발을 하면서 집을 조용히 빠져 나오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박씨는 “무조건 남을 돕기 보다는 내가 잘할 수 있고,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상대방과 함께 한다는 생각”이라며 “내가 남을 돕는 것이 아니라 도울 수 있는 기회를 준 상대가 고마울 뿐”이라고 했다.
◇인생 2막, 새로 배워 도전한다
‘휴먼북’은 각종 분야의 봉사자 213명이 참여한 가운데 251권이 등록돼 있다. 주제도 다양하다. 인문ㆍ사회과학에서 해외활동, 복지, 문화, 진로ㆍ취업, 금융ㆍ재태크, 건강ㆍ의료 등 모든 분야를 망라한다. 봉사자 중에는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휴먼북’이 되기도 하지만 은퇴 후 새로운 분야를 배워서 참여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휴먼북 ‘인생은 미래준비설계와 위기가 기회며, 항상 배우며 도전하라’의 주인공인 박권오(64)씨. 읍장, 면장 등을 거쳐 부산 기장군에서 36년 간의 공직 생활을 2011년 마무리했다. 박씨는 퇴직 후 봉사활동을 하고 싶은 생각으로 ‘스태킹’을 배웠다, 양손으로 컵을 빠른 속도로 쌓았다 내리는 스포츠로 초ㆍ중학교 체육교과서 대부분에 정식 체육 종목으로 나와 있는 것이다. 평생 공직 생활만 했던 그에게는 낯설고도 익숙하지 않은 것이었지만 그는 ‘도전’했다. 2017년 봄부터 배우기 시작했고, 내친 김에 코치 자격증까지 땄다. 현재는 스포츠 스태킹협회 운영위원을 맡고 있다.
박씨는 “항상 배우고 도전하는 것이 중요한데 인생 2막도 마찬가지”라며 “기회가 있으면 도전하고, 도전하면 찾아 오는 기회를 잡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스태킹을 배운 덕분에 ‘휴먼북’ 활동을 할 수 있게 됐고, 누군가에게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전달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것이다.
그는 스태킹, 컵을 쌓고 내리는 것을 가르치면서 인생 철학을 전한다고 했다. 박씨는 “컵을 쌓았다 내리고, 또 다른 모양으로 컵을 쌓았다 내리는 과정이 우리 인생과 같다”면서 “항상 도전하고, 마음을 비우고 하는 것을 반복하는 것, 이것이 삶이라는 이야기를 스태킹을 하면서 나눈다”고 했다. 휴먼북을 통해 만난 40~50대들도 박씨의 말에 공감을 했다. 초ㆍ중등 학생들에게도 진로 상담을 비슷한 방식으로 하면 자신의 진로에 대해 보다 적극적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대형 선박들을 만드는 삼성중공업에서 설계부장으로 일하다 2016년 퇴직한 안상곤(63)씨도 새로운 분야를 배웠다. 그는 “인생 2막에서는 과거에 경험한 적이 없는 새로운 것에 도전해 보는 그 자체가 의미가 있다”고 했다. 그는 선박과 자신의 전 직장과 전혀 관계가 없는 ‘반려동물과 함께 생활하기’란 휴먼북을 운영하고 있다. 2년 전 반려동물관리사 교육을 받고 자격증도 땄다. 낯선 분야이긴 했지만 반려동물과 관련된 봉사 활동도 하면서 큰 보람을 찾고 있다고 했다. 경로당 스마트폰 교육지원단 활동도 하고 있다. 안씨는 “인생 1막은 먹고 살기 위해 일하면서 보낼 수 밖에 없었다”면서 “인생 2막에서는 봉사나 보다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인생 2막에서 자신이 해왔던 분야의 경력을 살릴 수 있으면 좋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면서 “새로운 것을 배우는 데 두려워 말고, 새로운 분야의 새로운 전문가가 되겠다는 마음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부산=권경훈 기자 werthe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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