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삼국지: 명장 관우' 스틸 이미지. NEW 제공

관우는 소설 삼국지에서 영웅으로 묘사된다. 소설 때문인지, 사후에는 의리의 화신으로 신성시 된다. 아직도 중국에는 관우를 모시는 사당이 넘친다. 공자의 사당은 부자묘(夫子廟) 또는 공자묘(孔子廟)라고 하는데, 관우의 사당은 관제묘(關帝廟) 혹은 관왕묘(關王廟)라고 한다. 호칭에서 볼 수 있듯 공자보다 한 등급 위다. 관우 사당이 공자묘 보다 많다고 한다. 민간에서도 관우의 초상이나 위패를 모시는 풍습이 아직 많이 남아있다. 그래서인지 관우의 죽음에 대해서도 신비한 이야기가 많이 전해진다.

기실 정사(正史) 삼국지에서 관우의 죽음에 대한 기록은 대단히 소략하다. 여러 정황이 얽혀서 패전과 전사(戰死)를 초래했다는 서술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나 관우가 패전으로 사망한 만큼, 일련의 과정을 병법(兵法)으로 분석해 볼 수도 있다.

객관적 사료에 근거해 관우의 패전을 분석한 ‘백전기법(百戰奇法)’이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백전기략(百戰奇略)’이라고도 하는데, 명나라 유기(劉基)의 저작이라 전한다. 유기는 명나라의 개국공신인데, ‘앞에는 제갈량이 있고 뒤에는 유기가 있다’는 평을 듣는 인물이다. 저자에 대한 이견도 있지만, ‘백전기법’을 읽어보면 병법과 역사에 통달한 인물이 지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조선에는 선조 때 처음 수입되었고, 고종 때 임금의 하사금으로 무신들이 간행한 바 있다.

‘백전(百戰)’이라는 말에서 느낄 수 있듯이, 전략부터 전술에 이르기까지 여러 실전 상황을 100가지 항목으로 묶어 열거하고, 무경칠서(武經七書) 및 기타 고전에서 거기에 부합하는 구절을 뽑아 결구(結句)를 만들어 승리의 요체를 제시했다. 또한 각 항목에는 적절한 역사상의 전례(戰例)가 부기되어 있다. 춘추시대부터 송나라(1130)까지의 전쟁 실제 사례다.

병법의 관점에서 볼 때, 관우의 패인은 무엇인가. 백전기법은 ‘교전(驕戰)’과 ‘서전(書戰)’, 두 항목에서 설명한다. 결론은 장수의 교만과 정보 통제 실패가 부른 참사라는 것이다. 관우의 패전 과정은 다음으로 개략할 수 있다.

219년 관우가 형주(荊州)에서 북상하여 위나라 장수를 사로잡고 번성(樊城)을 포위하여 크게 위세를 떨쳤다. 당시 육구(陸口)에서 관우와 대치하고 있던 오나라 장수 여몽은 신병 치료차 도성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런데 귀국길에 누구도 중시 않던 육손에게 관우를 사로잡을 계책을 듣게 된다. 인재임을 알아본 여몽은 손권에게 자기 후임자로 육손을 추천한다. 육손이 부임하자마자 관우에게 보낸 편지가 걸작이었다. 개략은 다음과 같다. 자신은 늘 관우를 존경해 왔다. 장군이야말로 천하의 명장이다 등등, 글의 마지막은 간곡한 어조로 자신이 잘 모시겠으니 지도편달을 부탁한다는 얘기였다. 자연히 관우는 코앞에 주둔한 육손에 대한 경계심이 풀어지고 위나라 공격에만 집중한다. 이런 상황을 보고받은 오나라는 비밀리에 여몽을 보내 관우를 기습하도록 한다. 여몽이 관우가 원정한 틈을 노려 그가 다스리던 두 성을 탈취하자 남아있던 관우의 모든 부대가 투항한다. 마침내 관우의 근거지인 형주까지 점령하였다.

형주를 점령한 후, 여몽은 관우의 가족과 촉한의 병사 가족들이 모두 편안히 살도록 보살펴 주었다. 반면 오나라 군대에는 엄격한 군법을 적용하여 조그만 민폐에도 목을 베었다. 군사들은 이를 두려워한 나머지, 길에 떨어진 물건조차 줍지 않게 되었다. 여몽은 밤낮으로 형주성 안을 살피면서 노인들을 위문하고 생필품을 주고, 환자에게는 의약품을 보내주며 가난한 자에게는 의식을 제공하였다.

관우는 원정에 실패하고 퇴각하면서 사자를 보내 여몽의 기습을 힐문하였다. 그런데 여몽은 그때마다 사자를 후하게 대접하며 일부러 형주성 안을 돌아볼 수 있게 하였다. 주민들 중에는 생활에 변함이 없다는 증표로 편지를 써주는 자도 있었다. 관우의 사자는 돌아가서, 동료들의 걱정을 덜어주며, ‘가족들이 모두 무사하고, 종전보다 더 잘 산다’는 말까지 전했다. 관우의 병사들은 가족과 친지들이 여몽의 배려로 무사히 지낸다는 소식을 듣고 오나라에 대한 적개심이 사라지고 싸울 마음이 식어갔다.

오나라 임금 손권이 대군을 이끌고 형주에 왔다. 관우는 형주를 포기하고 서쪽으로 방향을 틀었지만 부하들이 모두 전의를 잃고 오나라에 투항하였다. 결국 이런 과정을 거쳐 관우는 소수의 병력만 거느리고 분전하다가 생포되어 죽게 되었다.

물론 관우도 억울하긴 하다. 우선 인근에서 관우를 도와줄 수 있는 촉한의 태수와 장군이 배신하고 손권에게 협력했다. 관우가 평소에 그들을 깔보았으므로 서로 감정이 있었기에 그랬다. 또한 촉한의 수도에 있던 제갈량도 지원군을 보내지 않았다. 제갈량 정도의 인물이 예견을 못했을 리가 없다고 하여, 모종의 음모론을 말하는 사람도 있다.

패자(敗者)에게, 전쟁은 늘 어이없고 억울한 사연 보따리일 뿐이다. ‘제궤의혈(堤潰蟻穴)’, 개미굴이 방죽을 무너뜨린다. 세상에는 독불장군도 없고, 큰일은 사소한데서 시작된다.

박성진 서울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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