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 “법안 추진 잠정 중단” 발표
중 ‘법안 재추진’ 가능성에… “완전 철폐” 검은 대행진 계속
람 장관, 결국 사태 이후 첫 사과… “정부 업무 부실 인정”
홍콩 정부수반인 캐리 람 행정장관이 15일 정부청사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통해 '범죄인 인도 법안'(일명 송환법) 추진을 보류한다고 발표하고 있다. 홍콩=AP 연합뉴스

홍콩 정부가 밀어붙이던 중국으로의 범죄인 송환 법안을 일단 접었다. 100만 반대 시위와 미국의 압박, 국제사회의 여론에 밀려 동력을 잃은 탓이다. 뒤에서 강행처리를 종용해 온 중국은 더 체면을 구기게 됐다. 특히 미국과의 무역전쟁 담판을 앞두고 꼬리를 내린 모양새다. 파국을 면해 꼬투리 잡힐 여지는 없앴지만, 홍콩에 대한 영향력의 한계를 절감하면서 중국의 리더십은 큰 상처를 입었다.

홍콩 정부수반인 캐리 람(林鄭月娥) 행정장관은 15일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범죄인 인도 법안 추진을 잠정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그는 “사회의 다양한 우려를 반영했다”, “지난 이틀간 반복된 내부 회의를 거쳤다”고 설명했지만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16일 “홍콩을 담당하는 중국 서열 7위 한정(韓正) 공산당 정치국 상임위원이 시위 사태를 점검하고 발표 직전 람 장관과 만났다”고 전했다. 사실상 중국의 지시에 따라 홍콩 정부가 백기 투항했다는 의미다. 행정장관은 친중 성향 인사가 장악한 선거인단 1,200명의 간접투표와 중국 정부의 승인을 거쳐 선출된다.

중국은 지난 9일 홍콩 시민 103만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12일 다시 수만 명이 반대 구호를 외칠 때만 해도 기세등등했다. 더구나 시위 진압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중국 본토 공안이 상당수 홍콩에 투입돼 시위대를 향해 고무탄을 비롯한 살상무기를 발포했다는 현지 증언도 나왔다. 중국 관영 매체는 “법안 찬성에 서명한 홍콩인도 90만명을 넘는다”며 맞불 여론전을 폈다.

하지만 740만 홍콩 시민 가운데 100만명이 집결해 세를 과시하면서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3만명에 불과한 홍콩 경찰이 대처하기엔 역부족이다. 온ㆍ오프라인을 꽉 틀어막아 지난 4일 톈안먼(天安門) 사건 30주년은 조용히 넘겼지만, 홍콩 사태는 실시간으로 전 세계에 중계되는 터라 대규모 유혈사태로 치달을 경우 뒷감당이 불가능하다. 중국 국무원 홍콩사무소가 15일 람 장관의 발표 직후 “홍콩 시민의 안전과 사회의 안녕이 가장 중요하다”고 지지 입장을 밝힌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일국양제(一國兩制ㆍ한 국가 두 체제)의 근본이 다칠 수 있음에도 중국이 물러난 데에는 미국의 개입이 결정타였다. 중국은 외교 채널을 통해 강력히 항의했지만 무역전쟁으로 포탄을 모두 쏟아부은 상황에서 딱히 추가로 동원할 수단이 없었다. 고작 중국 외교부는 14일 로버트 포든 주중 미국 대리대사를 불러 “홍콩 문제는 중국의 내정”이라며 “어떤 외부세력도 홍콩에 개입하는 것을 좌시하지 않겠다”고 경고했다. 대사가 공석인 상황에서 미국을 향한 최고 수준의 맞대응이었다.

중국이 말에 그치는 사이 미국은 행동에 나섰다. 미 상ㆍ하원 의원 10명은 13일 ‘홍콩 인권 및 민주주의 법안’을 제출했다. 매년 홍콩의 자치 수준을 평가해 기준에 미달할 경우 홍콩이 미국을 상대로 누리고 있는 특별대우를 박탈하는 내용을 담았다. 미국이 홍콩의 두 번째 무역 파트너인 점을 감안하면, 일국양제를 표방하며 홍콩의 자치를 선전해 온 중국을 향한 초강수 카드인 셈이다.

반면 중국은 미국을 자극하기 곤란한 처지다. 28~29일 일본에서 열리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계기로 미중 정상회담이 예정돼 있기 때문이다. 중국이 지난 1년여간 지긋지긋하게 시달려온 무역전쟁을 끝낼 물꼬를 틀 기회다. 따라서 홍콩 사태가 악화된다면 대화는커녕 시진핑(習近平) 주석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뭇매를 맞다 빈손으로 돌아올 수도 있다. 또 내년 미 대선을 앞두고 민주당 유력주자인 조 바이든 전 부통령도 트윗에 “홍콩 시위를 지지한다”고 입장을 밝혀 홍콩 사태가 대선 이슈로 부각될 참이다. 트럼프 대통령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당분간 중국이 홍콩 시위에서 한 발 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최근 5년간 홍콩의 주요 민주화 시위. 그래픽=박구원 기자

그렇다고 중국의 입장이 바뀐 건 아니다. 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16일 “범죄인 인도 법안 개정에 대다수 민의가 찬성하고 있다”며 “법치와 정의를 구현하고 번영과 안정을 이루려는 홍콩 정부의 활동을 중국 정부는 일관되게 지지한다”고 강조했다. 중국은 전 세계 71개국과 조약을 통해 범죄인을 송환하는 만큼, 중국의 일부인 홍콩과도 사법 공조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특히 중국은 고속철도를 깔고, 다리를 놓고, 경제권을 넓히며 홍콩과의 사실상 통합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이번 법안 처리는 불발됐지만 언제든 살아있는 카드인 셈이다. 다만 2003년 국가보안법 제정 추진 당시, 50만 시위대의 반발로 홍콩 정부가 두 달 만에 법안을 철회한 전례가 있어 중국도 섣불리 행동에 나서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이 같은 중국의 속셈에 맞서기 위해 홍콩 야권과 시민단체는 법안 연기가 아닌 완전 철회를 요구하며 16일 또다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검은 대행진’이라는 명칭에 걸맞게 시민들은 검은 옷을 입고 저항의 상징인 우산을 펼쳐든 채 빅토리아 공원에서부터 시내 중심부 정부청사가 있는 애드미럴티까지 4㎞ 구간을 행진했다. ‘악법 철폐’, ‘장관 퇴진’이라고 적힌 대형 현수막이 행렬 사이를 뒤덮었고, 시민들은 차분하면서도 분명한 목소리로 구호를 외쳤다. 시위대가 홍콩 도심 중심부를 가득 메우면서 103만명이 운집한 지난 9일 시위에 못지 않은 규모로 인파가 늘었다. 일부 홍콩 언론은 이날 시위 참가자 수가 최대 144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했다.

결국 람 장관은 이날 오후 8시30분쯤(현지시간) 성명을 내고 “정부 업무에 부족함이 있었음을 인정한다”고 공개 사과했다. 그는 “홍콩 사회에 커다란 모순과 분쟁이 나타나게 하고 많은 시민들을 실망시키고 가슴 아프게 한 점에 대해 사과한다”며 “모든 비판을 겸허히 수용하겠다”고 밝혔다. 이번 시위 사태와 관련, 그가 직접 사과 메시지를 전한 건 처음이다. 람 장관은 특히 시위를 주도한 민간인권진선 측이 “정부의 칼은 여전히 홍콩의 심장을 겨누고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법안 개정을 다시 추진할 수 있다”고 우려한 사실을 의식한 듯 “향후 입법 활동을 재개할 시간표를 갖고 있지 않다”고도 강조했다.

이처럼 주말 시위는 재개됐지만, 정부가 법안 추진을 사실상 무기한 연기하면서 시민들은 17일로 예고한 파업과 휴업을 철회하기로 했다. 다만 일부 교사들은 흰 옷을 입고 교단에 서서 반대 의사를 밝힐 예정이다. 한편, 15일 저녁 시내 쇼핑몰에서 홀로 반대 고공시위를 하던 30대 남성이 추락해 숨져 이번 사태 발발 후 첫 사망자가 발생했다. 시위 참가자들은 사고 현장을 찾아 꽃을 바치며 고인을 애도했다. 14일 저녁 도심 공원에서 6,000여명의 어머니가 모인 집회에서는 한 어머니가 기타를 들고 나와 “광주 민주화 운동을 대표하는 노래”라며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러 큰 박수를 받기도 했다.

베이징=김광수 특파원 rolling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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