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들 세계무대에 주눅들지 않고 도전, 감독은 존중ㆍ신뢰로 능력 끌어올려
강요된 투혼 아닌 시스템으로 육성… 국민은 성적보다 과정에 희열ㆍ감동 만끽

사력을 다해 뛴 90분이 지나고 종료 휘슬이 울렸다. 결과는 아쉽게도 한국의 1-3 패배. 한국 남자축구 사상 첫 국제축구연맹(FIFA) 주관대회 우승의 꿈이 눈 앞에서 사라졌지만, 20세 이하(U-20) 대표팀 선수들은 결코 울지 않았다. 허탈함을 삭인 그들은 되레 경기를 마치고 다가오는 우크라이나 선수들에 먼저 박수를 건넸고, 우승 세리머니를 끝까지 축하하며 승자를 예우했다. 대회 최고선수에게 주어지는 ‘골든볼’을 거머쥔 이강인(18ㆍ발렌시아)은 “이 상은 한 팀이 받은 것”이라며 미소 지으며 “후회 없기에 우린 울지 않는다”며 웃어 보였다.

한국 축구에서 지금까지 이런 팀은 없었다. 어린 선수들은 정정용(50) 감독의 “멋지게 놀고 나오라”는 말을 온몸으로 실천하며 한국 축구 사에 큰 업적을 남겼다. 16일(한국시간) 폴란드 우치에서 열린 FIFA U-20 월드컵 결승에서 한국 U-20 축구대표팀은 비록 결승에선 졌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유쾌함과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밀레니얼 세대인 1999년~2001년생으로 꾸려진 U-20 축구대표팀이 보인 23일간의 여정은 위대했다. 첫 경기였던 지난달 25일 포트투갈 전에서 졌을 때만 해도 큰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선수들은 전혀 주눅들지 않고 성큼성큼 정상에 다가갔다. 특히 차범근(66), 박지성(38), 손흥민(27)으로 이어진 ‘에이스’ 계보를 이을 이강인의 등장은 새로운 ‘축구 DNA’를 품은 세대의 시작을 알린 신호탄이기도 하다. 이강인은 자신보다 많게는 한 뼘씩 큰 서구권 선수들을 상대로 과감하게 기술로 승부했다.
존중과 신뢰를 바탕으로 선수들의 능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린 지도자들의 소통도 큰 역할을 했다. 한준희 KBS 축구해설위원은 “윽박지르는 지도법에서 벗어나 즐기는 축구로도 성공할 수 있단 점이 가장 큰 성과 가운데 하나”라고 짚었다. 선수 시절 프로무대 한 번 밟지 못했던 정정용(50) 감독은 이번 대회에서 선수들에게 성적에 대한 압박을 주지 않고도 가장 높은 성과를 만들었다. 36년 전 멕시코 4강 신화의 박종환 사단이 고지대에 대비한다며 마스크를 쓰고 뛰게 했다는 지옥훈련과는 전혀 다르다.

그들의 훈련엔 웃음이 넘쳤다. 경기를 마친 뒤 버스에서 다 함께 노래를 불렀고, 훈련장에선 음악에 맞춰 춤도 췄다. 이날 경기를 참관한 허정무 프로축구연맹 부총재는 “처절한 투혼을 짜내야 했던 선배들과 달리 수평적 분위기 속에 자율적인 훈련을 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지다 보니 실력을 한껏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이 된 것 같다”고 했다. ‘어게인 1983’을 넘어 스스로 ‘황금세대’임을 증명한 선수들은 이젠 ‘어게인 2019’의 출발점을 만들며 ‘스포츠는 투혼’에 익숙했던 기성세대에게 ‘즐기는 축구’의 묵직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이강인뿐만 아니라 이번 대회에 참가한 대부분의 선수들의 볼 터치나 패싱 등 개인 기량은 이전 대표팀보다 안정됐다는 평가다. 그 동안 공들인 유소년 육성 시스템이 드디어 결실을 보인 것이다. 강요된 투혼이 아닌, 시스템이 키운 실력으로 거둔 성적이다.

선수들은 대회 내내 포기 할 줄 몰랐으며, 결과에 승복하는 페어플레이 정신을 잃지 않는 모습으로 지켜보는 이들을 미소 짓게 했다. 지난 2018 평창동계올림픽 이후 국민들도 이젠 성적보다 그 과정을 중요시 여긴다. 준우승이란 결과에 국민들은 “아쉽다” 보다 “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라며 응원한다. 어린 선수들의 성숙한 모습에 한밤의 응원전을 벌인 시민들은 열패감 대신 희열과 감동을 안고 밀린 잠을 청할 수 있었다.
정정용 감독은 결승을 마친 뒤 공식기자회견에서 “우리 선수들이 이번 대회를 통해 한 단계, 두 단계 더 발전될 것”이라고 했다. 이번 대회를 통해 ‘성공의 방법’을 몸소 터득한 선수들의 미래에 대한 기대도 커진다. 대회를 마친 선수들은 며칠간의 휴식 후 곧바로 소속팀으로 복귀한다. 해외파 4명과 대학소속 2명을 제외한 15명의 선수는 오는 주말 재개되는 K리그 무대서 경쟁을 펼치며 U-20 월드컵에 쏟아진 국민들의 성원에 보답하겠단 각오다.
우치(폴란드)=김형준 기자 mediaboy@hankookilbo.o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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