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부르는 삼월의 노래] 김희곤 교수, 20여년 전 제보받아
서울 서대문형무소 수형기록카드의 이육사 시인 모습.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김희곤 안동대 사학과 교수(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장)가 집필하고 이육사문학관이 2017년 펴낸 ‘이육사의 독립운동’(이육사전집Ⅱ)의 221쪽에는 눈에 띄는 주석이 있다. 1943년 귀국했다가 체포된 뒤, 20여 일 지나 베이징으로 끌려 갔던 이육사. 주석은 ‘이때 육사를 붙잡아 갔던 사람 가운데 해방 이후 고위직을 지낸 인물이 있다는 제보가 있다’는 내용이다.

김 교수는 한국일보와의 통화에서 “20년도 더 전에 연구실로 전화가 왔다”며 “자신의 어머니가 잘 알고 있다고 그런 말을 했고, ‘당신 어머니 돌아가시기 전에는 밝히지 않을 테니 이야기 해달라’고 했는데 굉장히 망설이고 다시 전화 드리겠다고 하더니 연락이 오지 않았다”고 밝혔다. 김 교수는 “굉장히 아쉽다”고 했다. 제보 내용이 사실이고 해당 인물이 밝혀진다면 친일파 청산을 이루지 못한 대표적인 사례로 기록될 만 하다.

17차례 옥고를 치룬 이육사 시인은 주로 신문사에서 일하며 대구청년동맹, 신간회 대구지회 등에 몸담아 독립의식을 높이는 활동을 했다. 대구거리에 격문을 붙이고 일주일 동안 솔밭에 숨어 지낸 적도 있다고 전해진다(친적 이상흔의 증언). 그는 1930년 ‘별건곤’ 잡지에 발표한 글에서 대구지역 사회단체가 상당히 움츠러들었다면서 “새로운 용자여, 어서 많이 나오라”고 주문한다. 요주의 인물이었던 그는 걸핏하면 잡혀 들어가 고문을 당하고 풀려나기를 반복했다. 김희곤 교수는 “풀려날 때도 골병이 들어서 운신을 못할 정도로 고문을 당하고 나왔다”며 “일본은 정책 자체가 어떤 행위에 대한 응징도 있지만 향후 활동을 못하도록 못 박기 위해 고문을 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그런데도 이육사는 몸만 추스르면 정신은 그대로 가지고 다시 움직였다”고 설명했다.

이육사가 1931년 친척인 이원봉에게 보낸 엽서. “군아! 늘 폭풍 같은 나의 생활이야 별로 이상스러울 것도 없지만 이번이야말로 10년의 그리운 낯을 바람같이 가서 꿈같이 만나고 또 번개같이 떠나올 때 (중략) 아니 떠나면 안 되는 나의 생활아!’라고 썼다. 육사가 사용했던 필명 중 하나인 ‘이활’이라는 이름으로 보냈다. 이육사문학관 제공

이육사는 레닌을 높이 평가하는 글을 썼던 사회주의자였으며, 노동자투쟁을 통한 혁명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김 교수는 “3ㆍ1운동 때 사회주의가 들어오게 되는데, 그 때 나이가 20대 중반 이하이면서 독립운동을 했다면 사회주의 노선을 걷게 돼 있었다”며 “이육사 시인은 자신을 사회주의자가 아니라고 평가한다면 오히려 섭섭해 하실 것”이라고 했다. 이육사 시인의 딸 이옥비 여사는 “삼촌 두분(원일ㆍ원조)은 해방 후 이승만 대통령이 친일파를 등용하고 독립운동가를 탄압하자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는 것 같다’고 하셨고 월북하셨다”며 “아마 아버지도 살아계셨다면 월북하셨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육사 시인은 1943년 중국으로 떠나면서 “베이징으로 가서 동지를 만나보고, 다시 충칭으로 가서 어느 요인을 모시고 옌안으로 간다. 나올 때는 무기를 가지고 나와야 하겠는데, 그것을 만주에 있는 어느 농장에 두고 연락하겠다”라고 동료 기자이자 동지였던 이선장에게 말했다. 당시 충칭의 임시정부와 옌안의 조선독립동맹 사이에 합작 노력이 있었다. 육사가 무기를 들여올 계획을 가졌다는 점에 대해서, 김 교수는 “1940년대가 되면 독립운동사가 전반적으로 전투, 전쟁 쪽으로 기운다”며 “그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육사는 무기도 잘 다뤘다. 이옥비 여사는 “아버지는 권총을 어두운 곳에서도 금방 조립할 정도였다고 들었고, 삼촌들도 ‘형님이 무기에 관심이 많으셨다’고 말씀하셨다”고 전했다.

이진희 기자 rive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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