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을 든 사람으로부터 협박을 받아, 그에게 돈을 건넸다고 가정해보자. 협박범이 내 손을 직접 움직인 것은 아니니 나의 능동적인 행위일까. 그렇다고 기꺼이 지갑을 내놓은 것도 아니니 수동적으로 이뤄진 일이라고 봐야 할까. 인간의 행위는 능동과 수동, 이분법적 분류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선천적으로 지니고 태어난 것 혹은 지금껏 살아오면서 축적한 경험 때문에 인간은 온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자유와 의지, 책임에 대해 고민하던 일본의 철학자 고쿠분 고이치는 고대 그리스어 등에 존재했던 ‘중동태’에서 ‘제3의 길’을 찾았다. 능동-수동과 달리 능동-중동은 주어가 과정의 안에 있느냐, 바깥에 있느냐로 나뉜다. ‘중동태의 세계’는 중동태가 무엇인지에서 출발하지만 문법 책은 아니다. 저자는 하이데거, 들뢰즈, 스피노자, 아렌트 등 철학자의 사유를 짚으며 독자들에게 이분법적 사고체계 바깥으로 나올 것을 권유한다. 수동적 상태에서도 남아 있는 능동의 가능성을 통해 자유에 가까워지자는 말이다. 책은 친절하게 쓰였지만 철학적이다. 읽기가 만만치는 않다.
중동태의 세계
고쿠분 고이치로 지음ㆍ박성관 옮김
동아시아 발행ㆍ408쪽ㆍ2만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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