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조정반 훈령에 ‘미’ ‘중’ 빼고… 정부, 전략적 모호성 유지로 가닥
외교부가 미중 갈등 전담 태스크포스(TF)인 ‘전략조정지원반’(이하 전략조정반)을 설치하되 공식 규정에는 미중 사안과의 관련성을 일절 명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화웨이 제재 갈등을 시작으로 미국과 중국 중 한편을 택하라는 압박이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 정부는 일단 극도의 로키(low-key) 기조를 유지한다는 방침을 세운 것으로 풀이된다.
외교부는 지난 10일 이 같은 내용의 전략조정반 설치 훈령 제정안을 국회 외교통일위에 제출하고 12일 법제정보시스템에 등재했다. 해당 훈령에 따르면 외교부는 전략조정반이 수행할 업무를 △주요국 관련 외교 전략의 조정 △주요국 관련 긴급 외교현안의 대응 및 동향ㆍ정보 분석 △관계부처ㆍ지방자치단체와의 업무 협조 등으로 명시했다. 훈령 어디에도 미국, 중국 등 국가명은 없었고 전략조정반에 직원을 파견할 국(局)도 언급하지 않았다. 이미 언론보도를 통해 전략조정반이 미중 이슈 협의를 위해 신설되는 것으로 알려졌음에도 공식적으로는 전략조정반의 정체성을 감추기로 한 것이다.
외교부는 전날 전략조정반 신설 방침을 밝힐 때도 극히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김인철 외교부 대변인은 정례브리핑에서 ‘미중관계 전담조직 추진 계획을 설명해달라’는 요청에 “질문하신 사항에 딱 맞는 답일지는 모르겠다”고 전제한 뒤 전략조정반 관련 진행상황을 공개했다. 전략조정반 업무가 미중 이슈 담당이라는 기본 사실조차 언급하기를 꺼린 것이다. 같은 날 기자들을 만난 외교부 당국자도 ‘국민적 관심이 높고 다수부서에 걸쳐 있어 종합 대응이 필요한 사안’에 대해 전략조정반을 새로 둘 수 있다는 법령을 인용해 미중 이슈가 핵심 업무라는 사실을 두루뭉술하게 넘어갔다.
외교부의 이러한 태도는 미중 무역갈등이 초기 단계인 만큼 당분간 로키 대응을 이어가는 게 전략적으로 낫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외교 소식통은 “지금으로선 미중 어느 쪽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하는 쪽으로 정부가 가닥을 잡은 것 같다”며 “우리 정부가 나서 ‘미국과 중국이 정면 대치하고 있다’고 밝힐 수 없고 그렇게 한다 해도 아무 이득이 없는 상황이니, 전략조정반 관련 규정도 모호해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전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미중 갈등의 영향을 받는 전세계 국가들이 아직 ‘눈치 싸움’을 펼치고 있는 상황인 만큼 급격히 어느 한쪽으로 기울일 필요는 없다는 게 중론이다. 한 국책연구기관 전문가는 “인도, 영국, 프랑스 등 대부분 나라들이 미중 경쟁 구도에서 어떤 포지션을 취할지 고민하고 있다”며 “다른 나라들과 보조를 맞춰 가는 것이 유리한 국면이기 때문에, 정부가 신속하게 대응 방안을 마련하되 공연히 전략조정반 등에 미중을 거론하는 식으로 불필요한 관심을 야기할 필요는 없다”고 평가했다.
김정원 기자 garden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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