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철 포항시립극단 단원의 내 인생의 히트곡, 최무룡의 ‘외나무 다리’
2001년 3월, 포항시립극단이 올린 작품에 단역으로 출연했다. 객석을 둘러보고 온 선배들이 “멋쟁이 노신사가 앉아 계시니까 객석 분위기가 산다”면서 한마디씩 했다. 노신사는 나의 외할아버지였다. 나는 외할아버지가 연극을 보러 오실 줄은 몰랐다. 연기에, 객석에 앉은 외할아버지에,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겠다.
어린 시절,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는 바람에 나는 외가에서 살았다. 외할아버지를 아버지처럼 따랐다. 외할아버지를 “아빠”라고 부른 적도 많았다. 그런 외할아버지와 중3 때 이후로 거의 남처럼 지냈다. 내가 외할아버지와 너무 달랐던 까닭이었다. 외할아버지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지만 머리가 영특해 일본 와세다대학에 합격했다. 유학은 지역 유지가 학비를 보태줘서 다녀올 수 있었다. 외할아버지는 내게 “공학박사가 되라”고 하셨다. 당신의 입장에서는 그리 힘든 일이 아니었다. 당신도 공부 천재였지만 외삼촌들도 서울대에 척척 합격했다. 문제는 내가 외가 사람들과 너무 달랐다는 거였다.
책만 펼쳐 들면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연극을 공부할 때도 책은 별로였다. DVD 등을 빌려와 100번 넘게 돌려봤다. 그렇게 배우들의 동작을 연구했다. 대사는 자연스럽게 외워졌다. 내가 대사를 줄줄 외운다는 사실을 안 외할아버지가 “머리가 나쁜 건 아닌데...” 하고 아쉬워했지만, 난 그냥 연극에서만 머리가 비상하게 돌아갈 뿐이었다.
“네가 내 꿈을 이뤘구나. 고맙다!”
연극이 끝난 후 외할아버지가 내게 건넨 말이었다. 가장 멋있는 모습으로 나의 시립극단 데뷔 무대를 보러 오신 것도 놀라웠지만 그 뜻밖의 고백 앞에서 나는 아찔한 기분까지 느꼈다.
우리나라 신극(新劇)은 일본 유학생을 통해 국내에 들어왔다. 외할아버지는 와세다에서 공부만 하신 것이 아니라 문화와 예술에도 깊은 관심이 있으셨던 것이다. 심지어 한때 ‘배우’를 꿈꾸기도 하셨단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외할아버지의 삶이 신비한 비밀처럼 다가왔다.
외할아버지는 슬하에 6남매를 두셨다. 공부 하나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잘했지만 타고난 재산도 없는 데다 자녀도 많았다. 당신의 삶을 관통한 현대사도 너무나 신산스러웠다. 6남매 중 다섯을 피난을 떠난 부산에 눌러앉아 지내던 시절에 낳았다. 당신의 마음을 뜨겁게 달구었던 젊은 날의 꿈은 매일 매일 더 깊은 데까지 꽁꽁 눌러둘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긴 세월 닫아두었던 열망의 문을 내가 열어젖힌 것이었다. 당신과 가장 멀리 있다는 생각에 고등학교 졸업 이후 담쌓고 지내다시피 한 손자가 말이다.
9년 전 갑자기 돌아가시기 전까지, 외할아버지의 최대 관심사는 나의 연극이었다. 객석에 앉지 못할 때는 영상으로 찍어 보내 달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꼼꼼하게 연기 지도를 하셨다. 나를 통해 두 번째 인생을 사셨던 것이다.
살아보지 못한 삶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과 열망은 애창곡에도 고스란이 스며있다. 외할아버지는 ‘외나무 다리’를 즐겨 듣고 부르셨다.
당신은 ‘외나무 다리’를 걸어가듯 사셨다. 누구 할 것 없이 팍팍한 현실이 삶을 그렇게 몰고 가던 시절이었다. 내 연기 활동이 당신 마음속의 상실감을 조금이나마 달랬다는 사실에 더없이 뿌듯하지만, 내 연기를 더 보여드리지 못한 건 아직도 아쉽다.
김민철 연극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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