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니얼 밸리, 혁신의 심장을 가다] <1> 다양성 외치는 실리콘밸리
유색인종 수가 백인보다 많은 밀레니얼 세대가 미국서 주류로
성별ㆍ인종 다양한 기업, 수익 43% 더 많아… “능력 최우선”
“몇 년 간 실리콘밸리에서 일했지만 오늘처럼 참석자 모두 여성인 경우는 처음인 것 같네요.”
무대에 자리한 패널을 소개하던 사회자 시얼 당의 말에 큰 박수가 쏟아졌다. 지난달 23일 오후 미국 캘리포니아주 마운틴뷰시(市) 컴퓨터역사박물관의 한(Hahn) 오디토리움에서 진행된 스타트업들의 사업모델 소개행사. 창업자들은 물론 사업모델을 평가하고 조언하는 ‘심판’ 자격으로 나온 투자자 모두가 여성이라는 점에서 이 행사는 주목을 받았다. 이 행사는 비영리기구인 실리콘밸리포럼이 주최한 ‘위민인테크(Women in Tech)’페스티벌의 하나로 올해가 5년째다. 실리콘밸리포럼의 목표는 명확하다. 실리콘밸리의 성차별 문화를 해소하고, 다양성을 높이겠다는 것이다. 휴가를 내고 행사에 참석했다는 젊은 여성 엔지니어 케이티 브로넌(29)은 “엔지니어라는 직업 특성상 주변엔 늘 남자동료뿐이라 내가 느끼는 차별이나 경력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기 쉽지 않다”면서 “내 심정을 이해해줄 친구나 롤모델을 찾으려고 왔는데 오기를 잘했다”고 말했다.
미국이 다양한 가치를 추구하는 밀레니얼 세대(Millennialㆍ1981~1996년생)에 미래를 맡겼다. 이는 미국 경제의 핵심지역인 실리콘밸리에서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실리콘밸리의 핵심 노동인구인 밀레니얼 세대가 외치는 구호는 ‘차별철폐’. 미국을 세계 최강대국으로 견인한 핵심가치는 성ㆍ인종ㆍ연령과 상관없이 능력 있는 사람에게 보상하겠다는‘능력주의’다. 하지만 실리콘밸리의 밀레니얼 세대들은 미국의 능력주의가 허울 뿐이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통계만 살펴봐도 이들의 분노에는 일리가 있다. 2018년 기준 구글 직원의 69.1%가 남성, 30.9%가 여성이다. 여성리더십 전도사 쉐릴 샌드버그가 최고운영책임자(COO)로 있는 페이스북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남성 직원이 전체의 63.7%를 차지하는 반면, 여성은 36.3%에 그친다. 글로벌 투자분석업체 피치북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의 벤처투자자들이 스타트업에 투자한 1,300억달러 중 2.2%만이 여성이 창업한 스타트업으로 갔다.
‘인종’이라는 프리즘으로 들여다보면 더 처참하다. 구글을 비롯한 여러 테크기업에서 흑인과 히스패닉 직원의 비중은 5%를 넘지 않는다. 실리콘밸리가 ‘백인 남성의 유토피아’ 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이 지역 대표도시인 새너제이(San José)의 별명은 ‘San’을 맨(Manㆍ남자)으로 바꾼 ‘매너제이’다.
하지만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유색인종 수가 백인을 뛰어넘는” 세대이자 “정체성ㆍ다양성에 대한 감수성이 가장 뛰어난 세대”(브루킹스 연구소)인 밀레니얼 세대는 성ㆍ인종ㆍ성소수자(LGBT)에 대한 차별을 없애 미국을 진정한 능력주의 사회로 바꾸겠다고 전면에 나섰다. 밀레니얼 세대가 허리를 떠받치고 있는 실리콘밸리에서 열리는 창업대회나 투자유치모임은 거의 대부분 ‘흑인창업자의 밤’, ‘성소수자 창업자의 날(LGBTQ Demo Day)’ 등의 이름으로 소수 집단을 우대하겠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흑인이자 레즈비언인 알란 해밀턴(38)이 2015년 만든 벤처투자사 백스테이지캐피털은 좋은 예다. 이 투자사는 성소수자나 유색인종 창업자의 스타트업만 지원하고 있다. 말 그대로 ‘무대 뒤’에 가려져 있는 소수자들을 주인공으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소수자에게만 투자하겠다는 그의 발상은 젊은 투자자들의 호응을 얻었다. 백스테이지캐피털이 투자한 스타트업은 현재 60여개, 그에게 투자를 상담하는 소수집단 창업자는 매달 수백명에 이른다.
물론 실리콘밸리의 차별 폐지 움직임을 촉발한 계기는 2017년 2월 우버의 전 엔지니어 수잔 파울러 리게티가 회사생활 동안 상사로부터 겪은 성희롱을 폭로한 사건이다. 이후 안드로이드 창시자 앤디 루빈 전 구글 부사장이 부하 여직원에게 유사성행위를 강요했고, 사건 이후 사임한 그에게 구글이 퇴직금으로 무려 9,000만달러를 지불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실리콘밸리에서도 미투(#MeToo) 운동이 전개됐다.
수십년 간 공공연한 비밀이었던 성폭력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른 건 실리콘밸리의 주인공이 바뀌었기 때문. 2017년 채용전문업체 인디드가 실리콘밸리 일대 1,011개의 기업을 조사한 결과, 이 중 46%의 직원 평균 연령이 20~35세였다. 남녀평등, 소수자 인권이라는 가치를 내면화하며 성장한 밀레니얼 세대는 직장 내 차별과 부조리를 참지 않는다.
미투운동의 성공을 발판삼아 실리콘밸리의 밀레니얼 세대는 다음 단계의 행동을 준비하고 있다. 창업생태계의 다양성을 높이려면 구호만으로는 부족하다는 판단 때문이다. 지난해 3월 만들어진 젊은 창업자 연대모임인 ‘파운더스포체인지(변화를 추구하는 창업가들)’는 “다양성에 무관심한 투자자의 돈은 받지 않겠다”는 구호를 내걸었다. 투자 유치를 위해 벤처투자사를 찾아가면 온통 백인 남성만 상대해야 했던 경험은 회원들의 공통된 기억이다. 파운더스포체인지 관계자는 “투자자들의 성별과 인종이 모두 같다면 그들의 투자 결정 역시 한 쪽으로 치우치는게 불가피하다”며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자리에서부터 다양성이 실현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벤처투자사가 적어도 한 명의 소수인종 또는 여성 투자자를 파트너(핵심 투자자)로 선임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파운더스포체인지는 지난달 현재 1,000여개 스타트업이 참여하는 커다란 연대로 참여 기업도 이제 갓 첫발을 뗀 스타트업부터 드롭박스ㆍ에어비엔비 같은 중견기업까지 포함한다. 물론 투자자 앞에서 ‘을’이 될 수밖에 없는 창업자들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투자자들의 돈을 골라받는 일이 가능할까라는 의문도 제기된다. 명상 애플리케이션 심플해빗의 윤하 김(29) 대표는 “다른 투자 선택지가 없는 상황에선 정말 문제일 것”이라면서도 “ 팀 구성이 다양할수록 더 좋은 성과가 난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실제 심플해빗의 직원 20여명은 인종과 나이가 제각각이다.
물론 파운더스포의체이지의 자신만만한 시도는 유리 킴과 같은 40대 벤처투자자의 연대에 큰 도움을 얻었다. 실리콘밸리가 미투 스캔들로 들썩이던 2017년 여름, 유리 킴은 한 여성 투자자가 보낸“이 업계에 성희롱이 만연한 것, 그리고 소수집단 벤처투자자 수가 터무니 없이 적은 것을 더 이상 가만히 두고만 볼 수는 없다”는 내용의 메일을 받았고, 곧 다른 여성 벤처투자자들과 함께 ‘올레이즈(All Raise)’라는 비영리단체를 결성했다. 이들은 파운더스포체인지와 연대하는 것은 물론이고 매달 소수집단 창업가들의 고민을 상담하고 투자유치를 돕고 있다. 올레이즈에 참여하는 투자자들은 ‘다양성에서 더 많은 가치가 창출된다’고 믿는다. 남녀노소, 인종을 불문하고 모두가 소비자이기 때문이다. 유리 킴은 “개개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일은 소비자의 다양한 욕구를 더 잘 이해하게 한다”고 설명했다. 2017년 컨설팅업체 맥킨지가 글로벌기업 1,000곳을 조사한 결과 성별다양성 수준이 높은 기업은 낮은 기업에 비해 27% 더 많은 수익을 냈다. 여기에 인종 다양성 수준까지 높은 기업은 43% 더 많은 수익을 냈다.
밀레니얼 세대가 주축세력인 실리콘밸리는 이제 ‘진짜 능력주의’의 실현을 꿈꾼다. ‘우수하길래 뽑았더니 우연히 백인 남자더라’는 허울 뿐인 능력주의가 아니라, 성별ㆍ인종ㆍ성정체성을 차별하지 않고 능력만 평가하는 능력주의다. 구글 엔지니어 출신의 창업가 아슈토시 가그(46)가 2016년 개발한 채용서비스 플랫폼 ‘에잇폴드AI(8fold.ai)’는 실리콘밸리의 이런 분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인공지능(AI)으로 채용기업과 지원자의 경력을 분석, 가장 적합한 지원자와 직무를 추천하는 플랫폼으로 서류와 면접 없이도 최적의 지원자를 매칭한다. 하지만 가그가 무엇보다 자랑하는 기능은 ‘편견 배제 알고리즘’이다. 성별ㆍ인종적 편견을 드러낼 수 있는 직ㆍ간접적인 단어는 물론 지원자의 출신 학교나 지역을 나타내는 정보를 가린 채 오로지 경험과 성과로만 분석, 일종의 ‘블라인드 채용’을 유도한다.
인도 출신인 가그가 보이지 않은 차별 때문에 실리콘밸리에서 일자리를 얻는데 겪은 어려움이 이 플랫폼 개발의 동력이 됐다. 실리콘밸리 기업의 공정한 채용은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일일 뿐 아니라, 지속가능한 기업 문화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필수적이라는게 그의 지론이다. “밀레니얼 세대는 능력과 노력에 맞지 않는 부당한 대우를 참지 못합니다. 회사가 이들 인재를 붙잡고 성공하고 싶다면 공정한 채용은 피할 수 없는 과제입니다.”
마운틴뷰(캘리포니아주)= 신혜정 기자 aret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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