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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앞둔 이들 앞에 펼쳐놓은 ‘묘지 정원’… “행복했던 기억 떠올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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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앞둔 이들 앞에 펼쳐놓은 ‘묘지 정원’… “행복했던 기억 떠올라요”

입력
2019.06.14 04:40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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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스피스 병원 포천 모현의료센터, 기념정원ㆍ감각정원ㆍ건천 등 조성 

 존엄한 죽음의 의미 깨닫게 해… 기업들 후원 없이 개인 기부로 탄생 

호스피스 병원인 경기 포천 모현의료센터의 정원에서 한 환자가 침상에 누운 채 산책을 하고 있다. 모현의료센터 제공
호스피스 병원인 경기 포천 모현의료센터의 정원에서 한 환자가 침상에 누운 채 산책을 하고 있다. 모현의료센터 제공

한국에서 죽음은 금기다. 죽음은 삶의 마지막 과정이 아니라 캄캄한 단절로 받아들여진다. 죽음을 다루는 공간에서조차 죽음은 홀대 받는다. 묘지, 납골당, 화장터 등은 ‘혐오 시설’로 분류돼 삶의 공간과 철저하게 격리돼 있다. 이 같은 태도는 죽음을 앞둔 이들로부터 존엄한 죽음을 준비할 기회를 빼앗는다. 죽음을 다시 보려는 노력을 조심스럽게 시작한 공간이 있다. 호스피스 병원인 경기 포천시 모현의료센터에 설치된 1,650㎡(500평) 크기의 작은 정원으로, 지난 달 완공됐다.

정원의 콘셉트는 ‘삶과 죽음의 연결’이다. 경기 가평 아침고요수목원, 제주허브동산 등을 설계한 이병철(52ㆍ서남해안기업도시개발 조경본부장) 정원사가 디자인했다. 지난해 10월 센터 봉사자인 신현자(55)씨가 이 정원사에게 정원 설계를 부탁했다. “삶의 끝을 마주한 사람들이 아름다운 풍경을 기억했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고 한다. 신씨는 9년째 센터에서 화초 봉사를 하고 있다. “생이 얼마 남지 않은 환자들에게 행복한 정원을 만들어 달라”는 신씨의 부탁을 이 정원사는 곧바로 수락했다. 비용은 일절 받지 않기로 했다.

경기 포천시 모현의료센터 기념정원에 있는 묘지 위에 갖가지 꽃들이 심어져 있다. 강지원 기자
경기 포천시 모현의료센터 기념정원에 있는 묘지 위에 갖가지 꽃들이 심어져 있다. 강지원 기자
묘지 위에 꽃을 심어 정원처럼 꾸민 묘지공원은 외국에서는 흔하다. 사진은 오스트리아 잘츠캄머굿의 한 묘지정원. 이병철씨 제공
묘지 위에 꽃을 심어 정원처럼 꾸민 묘지공원은 외국에서는 흔하다. 사진은 오스트리아 잘츠캄머굿의 한 묘지정원. 이병철씨 제공

 ◇죽음은 삶의 자연스러운 연장…‘기념 정원’ 

센터는 1971년 가정방문 호스피스 활동을 시작한 천주교 수녀회 ‘마리아의작은자매회’가 만들었다. 2005년 개원한 센터에는 30~40명의 환자들이 잠시 머물다 떠난다. 입원한 환자들이 죽음을 준비하는 시간은 평균 20일에 불과하다.

최근 기자가 다녀온 정원은 평화롭고 안온한 공간이었다. 정원에 처음 들어서면 ‘기념 정원(Memorial Garden)’이 나온다. 가짜 묘지 세 개가 나란히 앉아 있는 아담한 공간이다. 봉분 없는 평묘 위에 마가렛, 아이리스, 블루세이지 등 심어져 있어 묘지보다는 꽃밭을 닮았다. 국내 최초의 묘지 정원이다. 묘지 정원은 ‘묘지를 화초로 아름답게 꾸민 정원’으로, 프랑스 파리의 페르 라셰즈 묘지,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마인츠 묘지ㆍ함부르크의 올스도르프 묘지 등이 대표적이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산책하는 공간에 묘지라니, 아무래도 낯설다. 이 정원사의 설명은 이렇다. “외국에서는 아름답게 꾸민 묘지를 마을 안에 둬요. 사람들은 묘지를 공원처럼 즐겨 찾지요. 한국의 추모 공원은 이름만 공원이지 공원과는 거리가 멀잖아요. 더구나 기피 시설로 분류되다 보니 유가족 외에는 찾지 않는 곳이 됐어요.”(이 정원사)

이 정원사가 묘지를 다시 본 건 개인적 아픔도 때문이기도 하다. 이 정원사의 어머니는 암 투병 끝에 지난해 세상을 떠났다. 그는 어머니의 묘에 꽃을 심었다. 아름답게 추모하고 싶어서였다. “외국에서는 묘지에 꽃을 심거나 고인이 좋아했던 물건을 올려 놓고 추억하는 일이 자연스러워요. 한국에선 상상도 못할 불경스러운 일이죠. 죽음을 굉장히 엄숙하게 받아들이고 금기시하니까요. 묘지를 어떻게 꾸미고 관리할지에 대해선 준비할 겨를이 없어요. 그러다 보면 죽음은 영원한 상처로 남아요.”

경기 포천시 모현의료센터 내 자작나무 산책길과 연결되는 감각정원에는 시각, 청각, 후각, 촉감 등을 일깨우는 식물들이 자라고 있다. 미소가득화초봉사단 제공
경기 포천시 모현의료센터 내 자작나무 산책길과 연결되는 감각정원에는 시각, 청각, 후각, 촉감 등을 일깨우는 식물들이 자라고 있다. 미소가득화초봉사단 제공
하얀 자작나무가 빼곡히 심어진 산책길 양 옆 돌담은 침상이나 휠체어를 탄 환자들이 손으로 쓰다듬을 수 있는 높이로 설계됐다. 모현의료센터 제공
하얀 자작나무가 빼곡히 심어진 산책길 양 옆 돌담은 침상이나 휠체어를 탄 환자들이 손으로 쓰다듬을 수 있는 높이로 설계됐다. 모현의료센터 제공

 

 ◇행복한 생의 기억을 되살리는 ‘감각 정원’ 

기념 정원을 지나면 자작나무 202그루가 양쪽으로 빼곡하게 늘어서 있는 좁은 산책길이 나타난다. 턱 없는 황톳길을 환자들은 휠체어를 타거나 침상에 누운 채 천천히 오간다. 환자들이 병실 천장 혹은 TV만 보는 마지막 날들을 보내지 않게 하기 위한 배려다.

10m쯤 되는 산책길을 지나면 화려한 감각 정원이 펼쳐진다. 육체의 고통에 허물어져가는 환자들의 감각을 일깨우는 공간이다. 인동초, 장미, 산수국, 작약, 블루세이지, 백합, 아이리스, 작은꿩의비름, 채송화 등의 알록달록한 색은 시각을 자극한다. 초코민트, 로즈마리, 라벤더 등 향이 강한 허브는 후각을 기분 좋게 건드린다. 돌을 쌓아 만든 벽에서 콸콸 쏟아지는 물 소리, 숲으로 날아드는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는 청각을 깨운다. 이 정원사는 “감각 정원은 환자들이 엄마 품을 벗어나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성장한 청년기를 상징한다”며 “환자들이 삶의 기억과 경험을 다시 떠올리게 하기 위해 만든 곳”이라고 설명했다.

병원을 운영하는 막달레나 원장 수녀는 환자들이 정원에서 행복했던 기억에 빠지는 모습을 자주 목격한다. “이 꽃 그 때 거기 놀러 가서 본 꽃이네. 그때 참 행복했는데.” “이 꽃은 우리집에서도 키웠어. 정말 예뻤지.” “여기는 애들이랑 여름에 놀러 갔던 공원이랑 비슷하네. 너무 재미있는 시절이었는데.” 막달레나 수녀는 “병실에 있으면 아픈 얘기만 하는 환자들이 정원에서는 즐거운 추억을 얘기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뭉클해진다”며 “죽음이 끝이 아니라 자연으로 돌아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깨닫는 공간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경기 포천시 모현의료센터 내 어머니의 자궁 모양을 닮은 ‘건천’은 은유적으로 삶의 탄생을 의미한다. 모기가 생길 수 있어 건천으로 설계했다. 미소가득 화초봉사단 제공
경기 포천시 모현의료센터 내 어머니의 자궁 모양을 닮은 ‘건천’은 은유적으로 삶의 탄생을 의미한다. 모기가 생길 수 있어 건천으로 설계했다. 미소가득 화초봉사단 제공

감각 정원을 돌아 나오면 건천이 나온다. 삶이 시작된 곳이자, 가장 안락한 공간이었던 어머니의 자궁 모양을 형상화했다. 정원이 역설적으로 삶이 탄생하는 곳에서 끝나는 셈이다. 이 정원사의 설명. “우리가 삶을 선택하지 못하듯, 돌아갈 때의 운명도 선택할 수 없어요. 태어날 때처럼 죽음도 준비해야 해요. 죽음은 아름답게 마무리해야 할 삶의 한 부분입니다.”

경기 포천시 모현의료센터의 정원은 침상과 휠체어가 이동할 수 있도록 황톳길을 순환형으로 설계했다. 미소가득화초봉사단 제공
경기 포천시 모현의료센터의 정원은 침상과 휠체어가 이동할 수 있도록 황톳길을 순환형으로 설계했다. 미소가득화초봉사단 제공

 ◇작은 기부가 모여 탄생한 ‘기적 정원’ 

센터의 정원은 ‘기적의 정원’이기도 하다. 신씨가 올해 초 공사기금 모금에 나선지 약 3개월만에 공사비 1억875만원이 모였다. 기업이나 단체 후원 없이 개인 487명이 모은 액수다. 정원 조성 취지에 공감한 센터 환자, 센터에서 가족을 떠나 보낸 유가족, 간병인, 동네 주민들이 십시일반 동참했다. 신씨는 그 마음들을 기적이라 불렀다. “수많은 사람들이 작지만 소중한 마음으로 정원을 함께 만들어줬어요. 이 아름다운 정원에는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이 더 많답니다.”

포천=강지원 기자 stylo@hankookilbo.com

경기 포천시 모현의료센터 정원 조감도. 미소가득화초봉사단 제공
경기 포천시 모현의료센터 정원 조감도. 미소가득화초봉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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