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세먼지 속에서도 이 강산은 여전히 싱그럽고 푸르다. 세월호와 다뉴브강이 삼킨 뭇 생명의 멸진을 아는지 모르는지 꽃은 피었다가 바람에 날린다. 32년 전 6월도 그랬다. 학생과 청년이 일어서고, 재야가 앞장서고, 노동자와 농민이 동참하고, 야당이 힘을 보탠 항쟁의 거리에서, 시민들이 함께 벌인 축제와 난장을 우리는 ‘6월항쟁’이라 부른다.
6월항쟁을 거쳐 우리는 비로소 ‘자유’가 되었다. 10월 유신 이후 이 나라에는 자유가 없었다. 긴급조치와 포고령, 국가보안법과 집시법, 강제징집과 보도지침으로 입에 재갈을 물린 채 침묵과 굴종을 강요당했다. 참으로 견디기 힘든 시절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 쪽팔리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한목소리로 자유를 외쳤고 6월항쟁을 통해 말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를 되찾았다.
6월항쟁을 거쳐 우리는 비로소 ‘시민’이 되었다. 기존의 헌법을 폐기하고 만든 새 헌법 전문에 ‘불의에 항거한 4ㆍ19 민주이념을 계승’할 것을 적시했다.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하고 헌법재판소 설치, 지방자치제 실시, 국정조사권 부활을 제도화한 것도 6월항쟁이 이룬 과실이다. 무엇보다 우리는 스스로 민주헌정질서를 회복하여, 통치 대상인 국민에서 주권자 시민으로 거듭났다.
6월항쟁 이후 경실련,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가 속속 결성되고 시민사회가 성장하여 정부ㆍ시장ㆍ시민의 3자 역학관계가 정립되었다. 이제 자유의 담지자가 된 이 실존적 시민들은 민주주의의 확장과 심화를 요구했다. 각종 과거사 위원회가 만들어졌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도 설립되었다. 사업회는 국회와 정부의 지원을 받아 6월항쟁을 국가 기념일로 승격시켰다. 6월항쟁에 대한 사업회의 화답이었다.
30여년 뒤, 다시 광장으로 쏟아져 나온 시민들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평등’을 외치며 촛불혁명에 동참했다. 제2의 6월항쟁이었다. 권위주의를 타파하고 정권을 교체했다. 국가는 시민의 행복을 위한 수단이지 결코 목적이 될 수 없다는 자각과 개인의 발견이 함께 이루어졌다. 우리는 새 정부가 수십 년 뿌리내린 적폐를 청산하고 ‘기회는 균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를 응원했다. 켜켜이 쌓인 폐단을 하루아침에 다 없애기는 어렵겠지만 재벌 개혁과 경제민주화 정책으로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보수 야당의 반대를 뚫고 연동형 비례대표제 법안을 패스트 트랙에 태운 것, 남북한 긴장 완화 조치와 한반도 평화에 대한 소신과 의지를 제외하면 무엇 하나 제대로 되어가는 것 같지 않다. 높은 자살률, 낮은 출생률, 높은 실업률과 노인 빈곤율, 사회적 약자에 대한 멸시 등 우리 사회의 위기가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사회적 시스템의 누수 상태도 심각하다.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고 있는 류현진의 강점은 탁월한 위기관리능력에 있다. 홈플레이트 구석을 찌르는 절묘한 볼 컨트롤과 포심, 투심, 커트, 타자의 타이밍을 빼앗는 체인지업 등 다양한 구질의 공을 구사한다. 때론 하이 패스트 볼로 타자를 현혹시키기도 한다. 타자의 심리를 꿰뚫는 영리함과 웬만한 위기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멘탈을 갖추고 경기에 임한다.
우리 정부도 선거법 개정, 청년 주거 문제 등 빠른 집행이 필요한 정책(포심ㆍ투심 패스트볼)과 시차 조정이 필요한 청년실업과 노인 빈곤 문제(컷 패스트볼), 확실한 변화가 필요한 국민기본소득과 사회안전망 확충(체인지업) 등 다양한 정책을 시기와 방법에 맞게 자유자재로 구사할 줄 알아야 한다. 국민의 마음을 업어 확신(멘탈)을 가지고 위기관리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
6월항쟁은 기존의 질서를 뒤흔든 ‘시민’의 발견이었고 촛불혁명은 국가와 시민의 관계 속에서 ‘개인’을 발견했다. 6월항쟁 32주년과 함께 세월호에 수장된 아이들도, 다뉴브강에서 스러져간 사람들도 꽃잎처럼 바람을 타고 우리 곁으로 흐드러지게 날릴 것이다.
이종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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