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고 싶다’는 욕망 때문에 글을 쓰기 시작한 정원에게 B강사는 입을 맞추려 하고, 거부당하자 “따먹고 싶었다”고 말하고, “따먹었으면 먹고 버렸을 거다”라고 말하고, “죽어버려라”고 말한다. 정원이 항의 이메일을 보내자 B강사는 “끊을 수 없는 불투명한 연정이 속을 복받치게 했던 것”이라고 답한다. 정원은 자퇴원을 작성하며 이렇게 쓴다. “시적 자유와 낭만성으로 포장되는 모든 폭력이 싫습니다.”
임솔아의 단편소설 ‘추앙’은 2011년 작가가 습작생이던 시절 경험한 일을 다룬다. 2016년 ‘#문단 내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이 벌어졌고, 임 작가는 잡지에 해당 소설을 발표하며 성폭력 피해 경험을 털어놨다. ‘문단 내 성폭력’ 고발 운동은 곧 문화예술계 전체의 미투 운동으로 옮겨갔고 성 감수성과 인식체계를 변화시키는 계기가 됐다. 임 작가는 2017년 시집 출간 계약서에 출판계 최초로 성범죄 관련 조항을 명시했다.
장편소설 ‘최선의 삶’으로 문학동네 소설상을, 시집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로 신동엽문학상을 거머쥐며 소설과 시, 양쪽에서 재능을 모두 꽃피웠던 임 작가가 첫 소설집 ‘눈과 사람과 눈사람’을 냈다. ‘추앙’은 네 번째로 실렸다. “이 인물들은 여태 내가 겪어온 것들을 함께 겪은 동지들”이라는 작가의 말처럼, 소설 속 인물이 겪는 일련의 일은 작가가 거쳐온 변화와도 무관하지 않다. 무심하게 읊조리지만 불합리한 세계와 사람들의 위선을 담아내던 작가의 문제의식이 벼려지는 과정을 볼 수 있다.
눈과 사람과 눈사람
임솔아 지음
문학동네 발행ㆍ224쪽ㆍ1만 2,500원
소설 속 인물들은 끊임없이 ‘다움’을 요구하는 상황에 놓여있다. ‘추앙’에서 정원은 “너같이 옷 입는 애가 문학하는 거 안 어울려”라는 말로 ‘피해자다움’을 요구당한다. 수록작 ‘줄 게 있어’에서 주인공 영후는 자신을 만나러 오던 친구가 사고로 죽게 되자 슬픔과 반성의 태도를 요구당한다.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섣부르게 위로하는 어른들 틈에서 영후는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는 영후는 일종의 ‘가해자다움’을 배반하는 인물이고, 그런 영후를 세상은 ‘병들었다’고 판단한 뒤 격리시킨다.
경직된 기준을 세운 뒤, 이를 만족시키지 못할 경우 손쉽게 ‘비정상’의 낙인을 찍는 사회에서 주인공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상태와 감정을 증명해야 한다. 수록작 ‘병원’의 주인공 유림은 기초생활수급자인 자신을 연민하거나 경계하는 세상에서도 “누구나 겪는 만큼의 힘듦”이라고 생각하고 의연하게 산다. 그러나 이와 별개로 상황은 곧잘 나빠지고, “잘 살고 싶었지만 죽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자살을 택한다. 이마저 실패한 유림 앞에 놓인 것은 감당할 수 없는 거액의 병원비다. 건강보험 혜택을 받기 위해, 유림은 또 다시 ‘정신병력’을 증명해야 하는 처지가 된다.
그러나 “정상이라는 것은 계급이고 권력이라고 생각해. 정상이라 여겨지는 그 영역 안에 종속되어야 안심이 되니까. 나는 비정상이어서 아픈 게 아니라 나를 거부하면서까지 정상이 되려고 애를 썼기 때문에 아팠어” “너무나 오래 위장해왔기 때문에 무엇을 위장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되어가는 것을 정상이라고 말하면서, 다 함께 공평하게 곪아가고 있었으니까”라는 소설 속 대사처럼,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는 ‘윤리적 거짓’과 ‘선한 폭력’ 위로 그어질 뿐이다.
“집과 학교를 떠나 다른 세상으로 가려고 했다”는 임 작가는 고교 시절 학교를 중퇴한 뒤 23세에 검정고시를 보기 전가지 아르바이트를 하고 혼자 글을 쓰며 살았다. 그런 그가 맞닥뜨린 것은 “강직하거나 점잖다고 정평이 나 있는 수 많은 교수와 시인”이 권력을 이용해 자신을 존경하던 습작생들을 추행하거나 폭행하는 ‘일그러진 정상성’이었다. 임 작가는 6일 한국일보와의 통화에서 “피해자가 피해자답지 못한 행동을 하면 피해자가 아니고, 완벽하지 않으면 연대로써 실패한 것이고, 이런 규정은 폭력적”이라며 “이 같은 ‘규정’의 폭력에 내몰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독자들 한 명 한 명의 마음 속에서 규정 자체가 허물어지기를 바란다”는 바람을 전했다.
한소범 기자 beom@hanko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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