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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벨트를 가다]커피에 숨은 고단한 삶

입력
2019.06.05 07:00
수정
2019.06.07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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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회>이르가체페 농가의 가난

커피나무와 야생 잡목이 어우러져있는 숲 속으로 좀 더 들어가다 보면 듬성듬성 커피 재배 농가들과 마주하게 된다. 대개 나뭇가지를 얼기설기 엮거나 마른 풀로 지붕을 덮고 흙으로 토벽을 쌓아 지은 움집들이다. 집은 비와 바람만 피할 수 있는 수준이고 실내가 토굴처럼 좁고 어두컴컴해 먹고 잠자는 기본적인 생활이 가능할까 의심이 들만큼 열악하다.

집 앞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있으니 금방 어디선가 나타난 동네 아이들이 낯선 이방인에게 모여든다. 옷은 더할 수 없이 꾀죄죄하고 대개 맨발 아니면 슬리퍼를 끌고 있다. 환하게 웃고 있는 아이들. 그 미소를 보는 순간 숨이 턱 막힌다. 달콤한 자스민 꽃향과 과일의 산미를 자랑하는 커피의 귀부인 이르가체페, 그 이름만큼이나 독특하고 우아한 커피의 향미에 이끌려 먼 곳인 에티오피아까지 찾아왔는데 여기서 마주한 커피 재배 농가 사람들의 삶의 현실은 첫 눈에도 너무나 참담하다.

물론 그들이 기본적인 생존, 생활권을 누리며 살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에티오피아는 인구 1억이 넘는 대국이면서도 2017년 기준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763달러에 불과하고 하루 1.9달러 이하의 돈으로 생활하는 극빈층이 약 3,000만명에 이르는 세계 최빈국 중의 하나다. 1980년대 수 백만 명이 굶주림으로 죽고 지금도 기아와 질병에 시달리며 각자 생존을 위해 고달프게 싸워가야 하는 이 나라의 사람들. 그 중에서도 깊은 이르가체페 골짜기의 가난한 커피 재배 농가들의 삶을 눈 앞에 맞닥뜨리고 나서 울컥함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왜 그다지도 가난한가. 대학시절 읽은 책의 제목만 머리에 떠오를 뿐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왜 그다지도 가난한가 말이다.

이르가체페 숲 속에서 마주한 커피농가. 나무와 풀로 얼기설기 엮은 집에서 3대(三代)가 살고 있다. 직접 목격한 커피 농가의 현실은 가난이나 빈곤이라는 단어로 설명하기 힘들만큼 열악했다. 최상기씨 제공
이르가체페 숲 속에서 마주한 커피농가. 나무와 풀로 얼기설기 엮은 집에서 3대(三代)가 살고 있다. 직접 목격한 커피 농가의 현실은 가난이나 빈곤이라는 단어로 설명하기 힘들만큼 열악했다. 최상기씨 제공

물론, 수도 아디스아바바 등 에티오피아 도시를 여행한 사람이라면 어느 곳이나 도농과 빈부의 차이가 있다고 주장할 지 모른다. 하지만 2017년 기준으로 커피가 이 나라 수출의 34%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생산물이라고 본다면 커피와 빈곤의 함수관계를 간과하기 어렵다. 아울러 에티오피아 인구의 15%인 1,600만명이 커피를 생산하고 커피 가공과 물류, 수출까지 포함하면 전체 에티오피아 인구의 25% 가량이 커피에 매달려 살아간다. 이 사실을 감안하면 커피가 이 나라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 대략 짐작할 수 있다.

나아가 커피가 빈곤의 사슬을 엮는 단초라는 의구심마저 든다. 커피 수출 비중과 경제 수준은 어느 정도 역 비례 관계에 있다. 예컨대 1인당 GDP가 320달러에 불과한 브룬디에서 커피는 전체 국가 수출의 거의 절반(48%)을 차지한다. 르완다, 탄자니아, 케냐 등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에서도 커피는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무역 비중을 갖는다. 중남미 커피 생산국들의 상황도 비슷해 온두라스, 과테말라, 콜롬비아 등 인접국들보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국가에서 커피는 수위를 다투는 중요한 수출 품목이다.

이들 국가들은 모두 열대의 고산지역으로 커피 재배에 최적지다. 그만큼 많은 양의 커피들이 생산되면서 국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크지만 너무 낮은 국제 커피(생두) 가격으로 국가 전체 빈곤의 원인이 되고 있다. 이르가체페처럼 우리가 즐기는 좋은 품질의 아라비카 커피는 에티오피아를 비롯한 커피 생산국 농가들의 가난을 양분으로 생산된 작물인 셈이다.

이르가체페 농가 마당에서 마주한 아이들. 아이들 뒤로 보이는 집은 헛간이나, 화장실이 아닌 아이들이 거주하는 집이다. 곤궁한 생활 속에서도 아이들의 웃음은 더 없이 밝았다. 최상기씨 제공
이르가체페 농가 마당에서 마주한 아이들. 아이들 뒤로 보이는 집은 헛간이나, 화장실이 아닌 아이들이 거주하는 집이다. 곤궁한 생활 속에서도 아이들의 웃음은 더 없이 밝았다. 최상기씨 제공

에티오피아 커피 농부들과 나는 커피를 매개로 연결돼 있다. 나는 자선이나 구호활동을 위해 이 곳에 온 것도 아니고 별난 오지 탐험을 즐기는 여행자도 아니다. 그저 좋은 커피를 찾기 위해 먼 길을 달려온 것인데 어느 순간 커피는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다만 사람이 사람에게 느끼는 막연한 연민과 왠지 모를 미안함, 그리고 이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 지 모를 아득한 기분이 뒤엉켜 아이들 앞에 멍하니 앉아있을 뿐이다. 한참 지나 현지 가이드가 이동해야 한다며 큰소리로 부를 때까지 묵직하게 내리누르는 착잡한 기분에 자리를 일어설 수 없었다.

아늑한 카페에서 즐기던 그윽한 이르가체페 커피 한 잔에는 지구 반대편의 가난한 나라, 그리고 깊고 어두운 이르가체페 산골짜기에 나무집과 움집을 짓고 사는 커피 농가 사람들의 열악하고 고단한 삶이 녹아있었다. 마치 진주를 만드는 조개의 깊은 상처처럼.

최상기 커피 프로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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