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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팽한 긴장과 나른한 평화' 두 얼굴을 마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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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팽한 긴장과 나른한 평화' 두 얼굴을 마주하다

입력
2019.06.04 18:00
수정
2019.06.04 19:13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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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개방한 ‘철원 디엠지(DMZ) 평화의 길’ 동행기

지난달 31일 ‘DMZ 평화의 길’ 철원 구간 사전 탐방 행사에 초청된 백마고지전투 참전 용사 이건모(왼쪽), 박명호씨가 화살머리고지 감시초소(GP)에서 착잡한 표정으로 한국전쟁 유해 발굴 현장을 응시하고 있다. 철원=최흥수 기자
지난달 31일 ‘DMZ 평화의 길’ 철원 구간 사전 탐방 행사에 초청된 백마고지전투 참전 용사 이건모(왼쪽), 박명호씨가 화살머리고지 감시초소(GP)에서 착잡한 표정으로 한국전쟁 유해 발굴 현장을 응시하고 있다. 철원=최흥수 기자

비무장지대에 또 하나의 길이 열렸다. 강원 고성에 이어 지난 1일 ‘철원 디엠지(DMZ) 평화의 길’이 일반에 개방됐다. 고성과 달리 이번엔 진짜 DMZ 안까지 들어간다.

1953년 정전협정으로 한반도의 허리를 자르는 군사분계선(MDL)이 설정되고 이를 중심으로 북쪽 2km에 북방한계선, 남쪽 2km에 남방한계선 철책이 쳐졌다. 폭 4km, 이 구간이 비무장지대다. 그러나 말뜻이 무색하게 남북은 비무장지대 안에 무장 군인이 상시 주둔하는 전방 감시초소(GP)를 곳곳에 세웠고, 일부 감시초소 사이에는 추진철책선을 설치했다. 고성 평화의 길은 추진철책선 바깥의 전방관측소(GOP)까지 가지만 철원 구간은 무장한 병력의 경호를 받으며 비무장지대 안의 감시초소까지 들어간다.

철원 대마리 두루미평화마을 체험관 앞에 ‘PEACE 1967’이라는 팻말이 걸려 있다. 대마리는 1967년 조성된 민북(민통선 이북)마을이다.
철원 대마리 두루미평화마을 체험관 앞에 ‘PEACE 1967’이라는 팻말이 걸려 있다. 대마리는 1967년 조성된 민북(민통선 이북)마을이다.
백마고지 전적지 주차장의 백마 조각상.
백마고지 전적지 주차장의 백마 조각상.
백마고지전투 희생자 위령탑으로 이어지는 길을 자작나무 숲으로 조성하고 태극기로 장식해 놓았다.
백마고지전투 희생자 위령탑으로 이어지는 길을 자작나무 숲으로 조성하고 태극기로 장식해 놓았다.

공식 개방을 하루 앞둔 지난달 31일 ‘철원 DMZ 평화의 길’ 사전 탐방 행사에 동행했다. 출발점은 백마고지 전적지. 1967년 조성한 민통선 이북 ‘대마리마을’과 인접한 곳으로 지금까지 관광객은 이곳까지만 갈 수 있었다. 주차장 한가운데에 앞다리를 하늘로 치켜든 백마 조각상이 상징물로 서 있고, 뒤편 언덕에 백마고지 전적비와 위령비, 전시관이 위치한다.

백마고지는 철원 신명리에 위치한 해발 395m의 야산이다. 전쟁 전에는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던 이 산을 놓고 1952년 10월 국군 9사단과 중공군이 열흘간 24번이나 뺏고 빼앗기는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국군 3,500여명이 죽거나 다쳤고, 중공군도 1만여명의 사상자를 냈다. 전투가 끝난 후 어느 부대장이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수목마저 사라져 민둥산이 된 모습을 흰 말이 누워 있는 형상으로 표현한 이후 백마고지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 누가 어떻게 셌는지 전시관에는 아군과 적군이 발사한 포탄이 무려 27만4,954발이었다는 기록도 적혀 있다. 이날 행사에 초청된 백마고지 참전용사 이건모(89), 박명호(87), 김영린(86)씨는 위령비에 빼곡하게 새겨진 844명의 전사자 이름을 잊어버리지 않으려는 듯 손끝으로 하나하나 더듬었다.

DMZ 평화의 길 사전 탐방 행사 참가자들이 경고문이 적힌 민통선을 통과하고 있다.
DMZ 평화의 길 사전 탐방 행사 참가자들이 경고문이 적힌 민통선을 통과하고 있다.
민통선 안 DMZ 평화의 길에 장식된 문구.
민통선 안 DMZ 평화의 길에 장식된 문구.
철책과 이어지는 길 맞은편은 한없이 평화로운 농촌 풍경이다.
철책과 이어지는 길 맞은편은 한없이 평화로운 농촌 풍경이다.

위령비를 넘어 A통문을 통과하면 바로 백마고지와 뒤편 북측 산자락이 푸르게 펼쳐진다. 이곳부터 B통문까지 약 3.5km가 탐방객이 걷는 구간이다(이날은 차로 이동했다). 오른편은 길과 나란히 철책선이고 왼편은 막 모내기를 끝낸 넓은 들판이다. 팽팽한 긴장과 나른하리만치 평화로운 풍경의 공존, DMZ의 두 얼굴이다.

백마고지 전망대에서 공작새능선 전망대까지 이어지는 이 탐방로는 철책 넘어 역곡천(逆谷川)과 나란히 걷는 길이다. 역곡천은 북한 평강군에서 발원해 남측 철원군을 거친 뒤 다시 북측 철원군으로 흘러 연천 미수복지구에서 임진강과 합류되는 하천이다. 남북 군사분계선을 W자 모양으로 넘나드는 형국이니 물은 경계가 없고, 강은 이데올로기가 없다. 살짝 푸른빛이 감도는 강물 주변으로 우거진 수풀이 바람에 희뜩거린다. 자유로이 경계를 넘나드는 것이 강줄기뿐일까. 무성한 원시림은 멧돼지와 고라니를 비롯한 들짐승이 몸을 숨기고, 겨울이면 5,000여마리의 두루미가 쉬어 가는 생태의 보고다.

공작새능선 조망대에서 보는 역곡천. W자 지형으로 남북 군사분계선을 넘나드는 강줄기다.
공작새능선 조망대에서 보는 역곡천. W자 지형으로 남북 군사분계선을 넘나드는 강줄기다.
공작새능선 조망대 뒤편으로 역곡천과 원시의 숲이 펼쳐진다.
공작새능선 조망대 뒤편으로 역곡천과 원시의 숲이 펼쳐진다.

평화의 감상은 C통문 앞까지다. 이곳에서 남방한계선을 넘으면 진짜 비무장지대다. 방탄복을 착용하고 동승한 군인의 눈빛도 더욱 날카로워진다. 신분증과 휴대전화를 맡기고 다시 차에 오르자 ‘철컥’ 하고 철문이 열린다. 차는 화살머리고지까지 1.5km 구간을 천천히 이동한다.

해발 281m 화살머리고지 꼭대기에는 군인이 상주하지 않는 감시초소(GP)가 있다. 벙커 아래층엔 GP를 지키던 군인들의 사진과 이곳에서 발굴한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구멍 난 총포, 장전된 M1소총, 총 맞은 수통 등 녹슨 유물의 주인 상당수는 아직도 이 능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벙커 상부로 올라가면 녹음이 무성한 산자락 한 귀퉁이에 붉은 속살이 드러나 있다. 남북 군사합의로 한국전쟁 전사자 유해 발굴 작업이 진행 중인 현장이다.

비무장지대 안 화살머리고지의 비상주 감시초소(GP)에 태극기와 유엔깃발이 걸려 있다.
비무장지대 안 화살머리고지의 비상주 감시초소(GP)에 태극기와 유엔깃발이 걸려 있다.
비상주 감시초소에 이곳을 지키던 군인들의 사진이 걸려 있다.
비상주 감시초소에 이곳을 지키던 군인들의 사진이 걸려 있다.
화살머리고지 감시초소 너머 군사분계선 인근에선 한국전쟁 희생자 유해 발굴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화살머리고지 감시초소 너머 군사분계선 인근에선 한국전쟁 희생자 유해 발굴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DMZ 평화의 길 마지막 코스, 화살머리고지 감시초소 철조망에 탐방객이 평화와 통일의 소원을 적어 걸었다.
DMZ 평화의 길 마지막 코스, 화살머리고지 감시초소 철조망에 탐방객이 평화와 통일의 소원을 적어 걸었다.
백마고지 참전용사 박명호씨도 ‘남북평화통일’이라 적은 글을 감시초소 철조망에 걸었다.
백마고지 참전용사 박명호씨도 ‘남북평화통일’이라 적은 글을 감시초소 철조망에 걸었다.
사전 탐방 행사에 초청된 대마리 묘창초등학교 학생들이 철조망에 걸 소원 글을 적어 보이고 있다.
사전 탐방 행사에 초청된 대마리 묘창초등학교 학생들이 철조망에 걸 소원 글을 적어 보이고 있다.

한 발짝도 더 갈 수 없는 초소 철망에 탐방객은 각자의 소원을 적어 걸었다. 백마고지 참전용사 박명호씨는 떨리는 필체로 ‘남북평화통일’이라 적었다. 전우 잃은 노병 이건모씨의 한마디가 가슴을 저민다. “내 나이 90이야. 이제 이쪽 말고 바라볼 곳이 어디 있겠어. (유해 발굴 현장을) 보니 눈물이 나지. 내가 저 자리에 누워 있었을 수도 있잖아.” 동행한 노태강 문화체육관광부 2차관은 “때로 돌아가고 때로 멈추는 경우도 있겠지만 정부는 평화를 만들어가는 노력을 지속해 나갈 것”이라고 위로했다. 감시초소 꼭대기의 태극기와 유엔 깃발이 먹구름 걷히는 하늘 위로 펄럭이고 있었다.

◇철원 DMZ 평화의 길 탐방 정보

‘철원 DMZ 평화의 길’ 탐방로. 그래픽=강준구 기자
‘철원 DMZ 평화의 길’ 탐방로. 그래픽=강준구 기자

철원 구간 ‘DMZ 평화의 길’은 화・목요일을 제외한 주 5일, 오전 10시와 오후 2시, 각 20명씩 탐방할 수 있다. 한국관광공사 걷기여행 홈페이지 ‘두루누비’와 행정안전부 비무장지대 통합정보시스템 ‘디엠지기’에서 참가 신청을 받는다. 개방 초기에는 추첨을 통해 참가자를 선정한다. 10세 이상만 참가할 수 있으며 4인을 초과하는 단체 신청은 허용되지 않는다. 백마고지 전적지까지 개별 도착하면 16인승과 12인승 차량 2대에 나눠 타고 이동한다. 접경지역이라 제한이 많다. 신분증은 꼭 지참해야 하지만 생수 외에 음식물과 담배는 소지할 수 없고, 허가되지 않은 방향으로 사진을 찍는 것도 엄격하게 금지된다.

철원=글ㆍ사진 최흥수 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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