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이 하와이서 교육사업 몰두하던 시기 공사비 모으려 방문
일본은 조선 발전상 홍보하며 회유… 해외 독립운동 열기 꺾는 기회로
1939년 남대문을 본떠 지은 하와이의 한인기독교회당. 한국일보 자료사진.

미 워싱턴군축회의(1921~1922)의 청원 외교 실패는 외교독립노선의 대표주자 이승만 전 대통령의 위기였다. 외교활동을 위해 4만 달러의 자금을 모아 준 재미한인 사회도 크게 절망했다. 1922년 하와이로 돌아온 그는 한인기독학원의 경영자로 활동하며 교육사업에 몰두했다. 그러던 중 이승만 전 대통령은 한인기독학원 신축공사 비용이 크게 부족해지자 학생모국방문단을 구성, 한국으로 보내 모금할 계획을 세웠다. 한인기독학원 원장 민찬호는 기독학원 기금모집을 위한 학생방문단의 방한 계획을 호놀룰루 일본 총영사에게 출원했다.

하지만 모국방문단은 일제의 통치 전략 중 하나였다. 1910년대부터 일제는 해외 한인들을 조선으로 불러들여 일제통치하 한국의 발전상을 경험하도록 해 이들의 배일감정과 독립운동 의지를 꺾고자 했다. 일례로 1916년 호놀룰루 일본기독교청년회가 제안한 한인모국방문단은 당시 호놀룰루 주재 일본 총영사관이 본국 외무성과 긴밀한 협의 하에 준비한 것이다. 이 방문단의 목적은 다름아닌 독립운동가의 회유 및 변절 유도였다. 1922~1923년에도 일제는 만주 서간도와 봉천, 시베리아 지역 한인들을 대상으로 고국을 방문하게 하고, 이를 널리 선전해 해외 한인의 회유정책에 활용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계획한 23명으로 이뤄진 모국방문단 일행은 1923년 6월 20일 호놀룰루에서 출발해 일본 요코하마와 부산을 거쳐 7월 2일 경성(京城ㆍ서울)에 도착했다. 이들은 열흘간 경성에 머물며 야구경기를 4회, 배구경기를 2회 관람하는 등 시간을 보냈다. 이후 13일부터 8월 27일까지 국내 체류하는 동안 30여개 도시를 방문했다.

모국방문단은 순회지역마다 하와이 동포들에 대한 민족 교육과 학교 증축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강연회와 기도회를 개최했다. 이들은 동포들의 환영만 받은 게 아니었다. 총독부 당국도 이들의 활동을 적극 후원, 해주에선 황해도 경찰부장이 다과회를 개최했고 사리원에선 군수와 경찰서장이 마중 나갔으며, 함흥에서는 함남도지사를 만났다.

두 달 간의 일정을 마치고 9월 1일 경성을 떠난 방문단이 전국에서 기부받거나 모금한 총액은 2만5,770원이었다. 이 중 9,613원은 왕복 여비로 사용됐고, 나머지 1만 6,000여원(약 3,600달러)이 기독학원으로 전달됐다. 애초 이승만 전 대통령이 예상한 1만 5,000달러의 3분의 1에도 못 미치는 금액이었다.

1921년 워싱턴 군축회의 청원 외교운동 당시의 이승만(왼쪽) 전 대통령과 서재필 선생. 한국일보 자료사진

하와이모국방문단은 워싱턴군축회의 실패 후 낙담해 있던 미주 한인사회의 분열을 증폭시켰다. 오랫동안 하와이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과 대립하던 박용만 계열의 대조선독립단은 이승만의 학교가 일본 원조를 받아 일본과 한국을 방문한 일을 비판하고 나섰고, 한인기독학원 동창회조차 반대를 표시했다. 북미 국민회도 기관지 ‘신한민보’를 통해 미주 교민들이 허다한 재정과 노력을 바쳐온 독립운동을 3만원에 저당 잡힌 것이나 다름없다고 꼬집으면서 이는 3ㆍ1운동 이후 재미한인들의 독립운동 열기가 고조되는 분위기를 저지하려는 일제의 포섭정책이라고 비판했다.

‘우남 이승만 연구’의 저자 이화여대 사학과 정병준 교수는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이 운영하는 학교의 학생들이 일본 여권을 가지고 일본 정부의 승인 하에 입국했다는 점은 단기적으로 임시정부와 독립운동 진영의 투항 증거로 선전될 수 있었다”라며 “장기적으로는 해외 학생들이 식민치하의 모국을 방문해 각지의 환대 속에 발전상을 체험하고 돌아가게 함으로써 해외 독립운동의 근거를 사상ㆍ문화적으로 파괴할 수 있는 것이었다”고 지적했다.

한편 정치적 위기에 몰렸던 이승만 전 대통령 개인에게는 새로운 기회가 됐다. 하와이모국방문단을 전후해 이상재ㆍ윤치호ㆍ신흥우 등을 비롯한 국내의 실력양성 운동론자들과의 연대가 구축됐고, 1925년 3월 국내 기반의 흥업구락부가 설립돼 임시정부 대통령 자리에서 탄핵된 이승만의 든든한 지지세력이 되었다.

박소영기자 sosyou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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