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당쟁 되풀이하는 슬픈 광장
그 배후엔 분열 부추기는 어둠의 정치
정치인들, 정동길 걸으며 반성하기를
정동(貞洞) 길을 걷는다. 편안하고, 황홀하다. 물감으로는 도저히 그려낼 수 없을 것 같은 연한 녹색의 나뭇잎들, 그 잎들이 부드러운 바람에 살랑거리며 아직은 무덥지 않은 햇빛을 찬란하게 반사할 때, 세상은 너무 아름답다. 구세군 고갯길에서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느긋하게 걸어 내려온다. 마치 한 폭의 그림 속에 들어온 듯 고즈넉하기가 도심의 한 복판임을 잊게 한다.
내리막길이 멈추는 곳, 정동 로터리에 서본다. 붉은 벽돌로 창연한 정동교회가 서있다. 100년 전 3‧1 독립선언서가 인쇄되고 거사를 위해 비밀리에 오간 민족대표들의 비장함이 흑백사진으로 다가온다. 무심히 오른쪽으로 발길을 내디뎌 골목을 따라가면 로마네스크 양식의 아치가 너무도 아름다워 가슴 시린 중명전에 다다른다. 1905년 이토 히로부미가 고종을 겁박해 대한제국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늑약을 체결한 곳이기에 무심하려 해도 어쩔 수 없이 비감함을 느낀다.
세련된 카페에서 진한 커피향이 흘러넘치지만, 그래도 정동은 시간이 멈춘 과거의 거리다. 여기서 서둘러 걷는 것은 낭만에 대한 모독이자 역사에 대한 무지다. 천천히, 느리게 걷노라면 서글픈 구한말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 애국지사가 되기도 하고, 민초가 되기도 하고, 고종이 되기도 한다. 명성왕후 시해 후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할 때 갔다는 고종의 길, 지금은 망루만 남은 러시아공사관은 다시는 그런 역사를 되풀이하지 말자는 각오를 다지게 한다.
돌고 돌아 다시 정동 로터리에 선다. 발길을 틀어 덕수궁 대한문과 시청광장 쪽으로 향하면, 만나고 싶지 않은 현재를 만나게 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종교단체가 고막을 찢을 정도로 높은 데시벨의 마이크로 시민들을 향해 ‘지옥이 어쩌고 저쩌고’ 겁박한다. 바로 옆엔 덕수궁 돌담길의 운치를 망가뜨리는 더럽고 누덕누덕한 천막들이 쳐져있다.
시청 광장 저편에서는 붉은 머리띠를 한 일단의 노동단체 집회자들이 멀리서도 선명하게 들릴 정도로 크게 운동가를 틀어놓고 거친 구호를 외치고 있다. 조금 더 걸어가면 광화문 광장이 나오고 한 무리가 다가온다. 태극기만 들면 좋으련만, 성조기까지 들고서 트럼프에게 우리 조국을 지켜달라고 한다. 부끄러움을 느낄 법도 하지만, 오히려 그들은 확신에 찬 충혈된 눈으로 그냥 지나치는 시민들을 째려보고 있다.
지도층의 무능과 분열로 초래된 망국의 슬픔이 켜켜이 쌓여있는 정동길을 지척에 두고서 시청 광장과 광화문 광장은 그때보다 결코 덜하지 않는 대립과 당쟁을 거듭하고 있다. 행여 나라가 망하지 않을까 봐 걱정하는 것처럼.
그러나 어찌 거리로 나선 이들만 탓하리오. 머리에 붉은 띠 두른 노동자들이, 성조기를 흔들어대는 태극기 부대들이 극한적, 분열적 언행을 서슴지 않는 데는 이들을 부추기고 갈라치는 어둠의 정치가 도사리고 있다. 진보와 보수라는 허울좋은 이념의 탈을 쓴 우리 정치는 국민들에게 끊임없이 묻고 있다. “너는 누구편이냐?”고.
도대체 진보와 보수가 뭘까? 죽기살기로 싸우기만 하는 그들이 보수가 뭔지, 진보가 뭔지 알기나 할까. 북한 문제에서는 평화를 우선시하고 노동문제에서는 유연성을 중시하면 보수인가, 진보인가. 성평등에 앞장서면서 경제 문제에서는 정부보다 기업과 시장을 중시한다면 보수인가, 진보인가. 에드먼드 버크나 존 스튜어트 밀 같은 18, 19세기 학자들을 들먹일 필요도 없이 보수는 법과 시장, 안정을 중시하고 진보는 평등, 변화를 보다 중시하는 경향성으로 보면 된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누가 더 국민을 위하고, 더 좋은 나라를 만들 진정성과 실력을 갖추고 있느냐이다.
정치인들이여, 너는 누구냐고 묻지 말라. 나는 누구냐고 자문하라. 정동길을 걸으면서 혹시 애국을 논하면서 사익을 우선하는 매국노는 아닌지, 나라의 미래가 안 보이는데 다 아는 것처럼 큰소리치는 무능한 지식인은 아닌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라.
이제 우리 국민들이 정치인들에게 묻는다. 너는 누구냐?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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