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외교독립노선의 퇴조와 이승만의 1924년

1923년 관동대지진 이후 조선인 학살 미국 본토에 알리려 기획
17일이면 될 여정을 쿠바 등 5개국 40여일… 1000달러 탕진
중국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수립된 후 1920년 12월 처음으로 임정을 방문해 목에 화환을 걸고 있는 이승만(오른쪽 세번째) 전 대통령과 군무총장 이동휘(오른쪽 네번째), 내무총장 안창호(맨 오른쪽) 선생.1920년 12월부터 1921년 5월까지 6개월간 상하이에 머문 이 전 대통령은 하와이로 돌아간 뒤 다시 임시정부를 방문하는 일은 없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우남(雩南) 이승만(1875~1965ㆍ건국훈장 대한국민장) 전 대통령의 독립유공자 공훈록은 인정받은 업적만큼 길고 빼곡하다. 하지만 공훈록의 1920년대 부분에 이르면 실패로 끝난 1921년 워싱턴 군축회의에 대한 짧은 서술 이후 1933년까지 별 내용이 없다. 상하이(上海) 임시정부 존립기반이던 외교독립 노선이 흔들리고 임정 세력간의 갈등이 증폭되던 시기. 이 전 대통령은 이 중요한 시간을 하와이에서 자신의 지지기반을 공고히 하는 데 힘썼기 때문이다. 그동안 대중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1920년대 초ㆍ중반 하와이에서의 이승만 전 대통령의 행보를 일본 외무성 문서 불령단관계잡건, 국민회 북미지방총회 기관지 신한민보, 이승만 일기, 해외의 한국독립운동사료(ⅩⅩⅡ): 미주편(4) 미주한인 민족운동자료 등을 통해 살펴봤다.

1924년 1월 25일 하와이 호놀룰루의 야마자키 케이이치(山崎馨一) 일본 총영사가 일본의 마츠이 케이시로(松井慶四郞) 외무대신에게 보낸 정보보고 문건. 하와이에 머물고 있던 이승만 전 대통령 행적에 대한 보고가 담겨있다. 일본 외무성 문서 ‘불령단관계잡건-조선인의 부-재구미7’권
◇교민 모금 1,015달러로 중미 돌아

‘이 땅에 임시로 머물고 있는 자칭 대통령 이승만의 미국행에 대한 보고’

의 한 토막이다. 이 문건에서 야마자키 총영사는 미국 워싱턴에서 프렛 트리프라는 조선독립자치기성법률고문이 “관동 대지진에 즈음하여 일본 정부의 관리 또는 자경단원에 의해 무고한 조선인이 학살당하고 있다”며 “영국, 미국 국무성에 보고하여 세계 인류의 여론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가장 좋은 기회이니 이승만 대통령을 미국으로 파견하기를 희망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하와이 대한인 교민단(이하 교민단)에 보냈다고 보고했다. 이후 교민단 본부에서는 격문을 띄워 임시의사회를 개최, 이승만 전 대통령을 미국에 파견해 ‘조선독립과 조선인 학살 사건의 조사 운동에 착수할 것을 의결’했다는 것이 문건의 내용이다.

1923년 9월 1일 일본 관동(關東) 대지진 당시 벌어진 조선인 학살은 임시정부와 미주 한인사회에 널리 펴져 공분을 자아내고 있었다. 상하이 독립신문은 ‘적에게 학살된 동포 횡빈(橫濱ㆍ요코하마)에만 1만5천’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지금까지 보도된 바를 종합하면 전부 2만여명이라는 가경할 다수로 산정되더라’(1923년 12월 26일)며 피해자 숫자를 추산했다. 미주 한인사회 민족단체인 국민회 북미지방총회의 기관지 신한민보는 ‘이승만 박사는 장차 대륙에 건너올 예정이라는 데 여행목적은 일본 진재(震災ㆍ지진) 시에 한인 학살사건에 대하여 워싱턴에 전왕하여 미국 국무성에 교섭하여 볼 계획이라는 바’(1923년 12월 20일)라며 대지진 조사를 위해 이승만 전 대통령이 여행준비를 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통령 여비공고서'이승만 전 대통령의 1924년 여행경비를 보조해준 재미한인들의 명단 및 액수 등을 기입한 장부. 해외의 한국독립운동사료(ⅩⅩⅡ): 미주편(4) 미주한인 민족운동자료

하지만 교민단이 임시의사회까지 개최한 것에 비해 우남의 여행 일정은 다분히 외유성이었다. 이승만 일기에 따르면 1924년 1월 23일 샌프란시스코로 향하는 배 마우이호(S.S. MAUI)를 타고 호놀룰루항을 홀로 떠난 이승만 전 대통령은 40여일이 지난 3월 6일에서야 미 동부 볼티모어 항에 입항, 워싱턴에 도착한다. 2년전 워싱턴 군축회의(태평양회의)를 앞두고 호놀룰루항을 떠날 때는 17일만에 워싱턴에 도착했던 것과 대조적이다.

세부 일정을 보면 1924년 2월 7일 증기선 베네수엘라호(S.S. Venezuela)를 타고 로스앤젤레스를 출발한 그는 미국이 아닌 중앙아메리카 지역인 과테말라와 엘살바도르, 니카라과, 파나마, 쿠바를 거쳐 3월 6일 볼티모어항에 도달했다. 자료들에 따르면 생전 처음 중앙아메리카를 방문한 이승만 전 대통령은 배가 정박할 때마다 주변 관광을 빠뜨리지 않았다. 그는 2월 16일 엘살바도르 항구에서 65㎞ 정도 떨어진 수도 산살바도르를 구경하고, 2월 19일 니카라과 코린토에 정박할 때에는 370㎞ 떨어진 수도 마노구아까지 기차를 타고 가 호텔에 숙박하며 관광했다. 태평양과 대서양을 잇는 파나마 운하를 거쳐 중앙아메리카 마지막 정박지인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 내리기도 했다.

이 모든 비용은 바로 교민단의 성금에서 비롯됐다. 교민단은 임시정부의 대표적인 자금줄이었던 구미위원부에 예속돼 이승만 전 대통령의 세력증강을 지원한 교민 친목단체였다. 1922년 6월 임시정부 임시의정원에서 이승만 내각 불신임안을 의결하자 그는 1923년 1월 교민단을 임시정부가 아닌 구미위원부 산하에 두어 임시정부로부터 분리했다. 여행경비를 보조해준 한인들의 명단 및 액수 등의 기입장부인 ‘이통령 여비 공고서’에 따르면 모두 329명의 하와이 마우이 오하우 섬 거주 한인들이 미화 1,032달러 15센트를 모금하고 이 가운데 인쇄비 등을 제외한 1,015달러 23센트를 이승만 전 대통령의 여행경비로 지급했다. 1910년대 하와이 사탕수수밭 노동자의 한달 임금이 25달러 수준이었음을 감안하면 이 금액은 노동자 한 명의 40개월치 월급에 달한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호놀룰루 항을 떠나고, 이틀 후 공개된 이 여비내역 문건에서는 ‘각하께서 워싱턴에 2월 중순 도착하실 터이오며’라고 밝히고 있다. 자금을 지원한 교민단도 샌프란시스코~워싱턴 열차 경로만 예측하고, 중앙아메리카 여행은 사전에 알지 못했던 것이다.

[저작권 한국일보]수정 이승만 전 대통령_신동준 기자/2019-06-03(한국일보)
◇329명이 모은 돈 두 달 만에 소진

이승만 전 대통령은 두 달여 만에 모금액 대부분을 썼다. 그가 교민단에 1924년 3월 15일 보낸 ‘리박사 여행비조’라는 제목의 편지에는 교민단이 모아준 성금의 사용처 내역과 사용 이유에 대한 서술이 담겨 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교민단으로부터 자신이 받았다고 한 978달러 25센트(교민단 사용내역 자료와 격차가 있음) 가운데 938달러 27센트를 사용했다. 자신이 밝힌 사용내역에 따르면 호놀룰루에서 중앙아메리카를 거쳐 뉴욕까지 항해한 비용이 445달러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했고, 여행 각지에서 자동차와 마차 사용비용 27달러 65센트, 각지 여행비 9달러 75센트, 전보비 14달러 85센트, 식비 27달러 30센트, 외국 친구에게 준 예물비용 32달러 35센트 등이었고, 안경과 단장(지팡이)을 고친 비용 1달러 60센트까지 적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편지에는 미국 행 도중 진행된 중앙아메리카 여행을 변명하는 대목이 있다. 당초 샌프란시스코에서 뉴욕까지 18일 정도 걸리고 경비도 덜 든다고 알고 증기 운송선표를 샀는데 막상 샌프란시스코에 와 보니 이 일정은 시간을 많이 잡아먹더라는 것이다. 그는 ‘배가 하루 이틀씩 정지하기도 하고 남들은 각국 도성을 유람하러 다니는데 혼자 배에 있기도 무미하고 유람도 즐기기 때문에 따라다녀 보니 구경은 잘하였으나, 자연히 경비는 더 들었다’고 설명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편지 말미에 ‘이것을 공포할 것은 아니나 몇몇 동지들에게 조용히 보이려거든 마음대로 하시오’라고 적었다. 그다지 떳떳하지 못한 여행 경비 지출인 점을 의식한 셈이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미국에서 한 발언도 이 여행의 알려진 애초 목적과 상충한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이승만 환영회 소식을 담은 신한민보는 '이 박사는 장차 쿠바에 있는 동포를 심방하고 돌아오는 길에 워싱턴에 들를 계획이라는데, 그의 말이 이번 자기의 여행은 무슨 공무를 위하여 온 것이 아니고 다만 무슨 사사로이 볼 일이 있어서 미주에 건너온 길이라고 말하였다고 하더라'고 보도했다. (신한민보, 1924년 2월 14일) 3월 1일 쿠바에 도착했을 때도, 쿠바 한인사회에 미리 알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만난 한인 교민은 없었다.

‘이승만과 한국독립운동’을 쓴 고정휴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는 “이승만 전 대통령이 1924년당시 미국 국무성과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문제로 접촉했다는 자료는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았다”며 "조선인학살은 교민들 대상으로 모금을 할 명분은 되지만 뚜렷한 증거자료가 없고, 이승만 전 대통령은 대지진으로 인한 피해로 일본에 대한 국제사회의 여론이 동정적인 상황에서 조선인 학살 이슈를 제기해 유의미한 성과를 낼 판단이 서지 않는다면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고 교수는 "1914년 파나마 운하 개통으로 미국의 대서양함대와 태평양함대가 바로 연결됨으로써 미국의 태평양 지배력이 높아지게 되는 군사적 의미가 상당히 컸기 때문에 파나마 운하를 한번 보고 싶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리박사 여행비조’라는 제목으로 하와이교민단에 보낸 편지. 1924년 3월 15일 보낸 이 편지에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여행비 내역이 담겨있다. 미주한인민족운동자료 미주편(4)
◇중미 여행 후 외교독립 퇴조

한편 ‘이승만과 김구’의 저자 손세일씨는 “이승만 일기의 기록만으로는 그가 왜 이 시기에 중앙아메리카를 혼자서 여행했는지 알 수 없다”라며 “어려운 상황에서 인구세와 한인기독학원 건축비 등 각종 성금을 희사한 동포들로부터 여비를 지원받아 여행하면서 관광 목적으로만 여행했다면 의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고 지적했다.

당시 임시정부는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된 후 1923년 8월 13일부터 임시정부의 재무총장인 이시영의 프랑스 조계지 집 일부를 청사로 쓰고 있을 만큼 궁색했다. 위임통치 청원 사건으로 이승만 전 대통령과 대립했고 임시정부에서도 탈퇴했던 신채호는 의열단 선언문인 조선혁명선언(1923년 1월)을 통해 국내의 자치론, 내정독립론, 참정권론, 문화운동과 더불어 이승만으로 대표되는 임시정부의 외교론, 독립전쟁준비론까지 강력하게 비판하며 ‘우리는 외교, 준비 등의 미몽을 버리고 민중 직접혁명의 수단을 취함을 선언하노라’고 혁명을 부르짖었다. 국내에서는 1923년 1월 의열단원 김상옥이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후 서울 효제동에서 일본 군경들과 총격전을 벌이다 권총으로 자결했고 1924년 1월 의열단원 김지섭이 일본 도쿄 궁성 정문 앞에서 폭탄을 던졌지만 3개 모두 불발해 현장에서 체포됐다가 형무소 복역 중 사형됐다. 중앙아메리카 유람을 마치고 워싱턴으로 돌아온 이승만 전 대통령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임시정부 임시의정원의 대통령 유고안 통과(1924년 6월)와 대통령 탄핵과 면직(1925년 3월)이었다.

박소영기자 sosyou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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