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법원이 태평양전쟁 A급 전범들이 합사된 야스쿠니(靖國)신사에서 빼달라며 한반도 출신 군인ㆍ군속 유족들이 제기한 소송에서 패소 판결을 내렸다.
도쿄지방재판소(법원)은 28일 합사자 유족 27명이 지난 2013년 10월 22일 제기한 2차 야스쿠니 합사 취소 소송에서 원고의 요구를 기각했다. 이날 판결은 소송을 제기한 지 5년 7개월 만에 나온 것이지만, 재판부의 판결문 낭독은 눈 깜짝할 새 끝났다. 재판부는 “원고들의 모든 요구를 기각한다. 소송 비용은 원고 측이 부담한다”는 판결만 내 놓은 채 판결 이유도 밝히지 않고 판사석에서 일어났다.
교도(共同)통신에 따르면 재판부는 합사가 고인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원고 측 주장에 대해 “합사 사실이 공표되지 않기 때문에 불특정 다수에 알려질 가능성이 없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원고 측은 일본 정부가 전몰자의 정보를 신사에 제공한 것이 종교활동을 금지한 헌법에 위반된다며 위자료 지급을 요구했으나, 이에 대해서도 “야스쿠니신사는 정보제공을 받지 않은 사람들도 합사하고 있다”고 수용하지 않았다.
야스쿠니신사는 근대 일본이 치른 전쟁에서 숨진 사람들의 영령을 떠받드는 시설로, 태평양전쟁 A급 전범 14명을 포함한 246만6,000여명이 합사돼 있다. 위패와 유골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합사자 명부만 있다. 여기엔 한반도 출신 2만1,181명도 함께 합사돼 있다. 일본 정부는 종교시설일 뿐이라는 입장이지만, 야스쿠니신사는 극우 인사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주장을 펼치는 제국주의 일본의 상징으로 꼽힌다.
원고 중 한명인 박남순(76)씨는 판결 후 도쿄지방재판소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아버지를 일본에 빼앗기고 고아처럼 살았다”며 “일본은 아버지를 빼앗은 뒤 죽여놓고 자기네 마음대로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했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우리 아버지가 언제 일왕을 위해 돌아가셨냐”며 “우리 아버지의 이름을 (야스쿠니신사에서) 하루 빨리 빼달라”라고 주장했다. 다른 원고인 이명구(81)씨는 “아버지를 야스쿠니 신사에서 꼭 빼내고 싶다”고 눈물을 흘렸다.
원고 측 오구치 아키히코(大口昭彦) 변호사는 “재판부가 자신이 원고들과 마찬가지 상황에 처했다면 이런 판결을 내릴 수는 없다”며 “오늘 판결로 이 문제가 끝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앞으로도 싸움을 멈추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유족 측은 한일 시민단체와 변호사들의 도움을 받아 2007년부터 합사 취소를 요구하며 법정 싸움을 벌이고 있다.
도쿄=김회경 특파원 hermes@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