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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받침 비와 사라진 석물…세종대왕 18왕자 운명 보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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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받침 비와 사라진 석물…세종대왕 18왕자 운명 보는 듯

입력
2019.05.28 18:07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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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석산 아래 연꽃 봉오리…세종대왕자태실이 성주에 들어선 까닭은?

세종대왕의 18왕자 태를 안치한 세종대왕자태실. 왕위에 오른 세조의 태실과 석물이 사라진 안평대군의 태실이 대조적이다. 성주=최흥수 기자
세종대왕의 18왕자 태를 안치한 세종대왕자태실. 왕위에 오른 세조의 태실과 석물이 사라진 안평대군의 태실이 대조적이다. 성주=최흥수 기자

성주 월향면 인촌리, 선석산(762m) 서남쪽 자락 봉긋한 봉우리를 태봉(胎峰)이라 부른다. 그 꼭대기에 ‘세종대왕자태실’이 자리 잡고 있어서다. 명칭이 복잡해 발음이 꼬이고 뜻도 다소 모호하다. 세종대왕의 아들, 그러니까 왕자의 태를 묻은 곳이라는 뜻이다. 태실은 왕실에서 자손을 출산하면 그 태를 봉안하는 곳이다.

민가에서도 태아에게 생명을 부여한 것으로 여겨 태를 소중하게 다뤘다. 땅에 묻거나 마당을 깨끗하게 치운 후 왕겨에 태워 재를 강물에 띄워 보내는 방법으로 처리했다고 한다. 왕족의 경우 국운과 직접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기에 항아리에 담아 전국의 명당에 안치했다. 세종대왕자태실에는 세종대왕의 열아홉 왕자 중 장자인 문종을 제외한 열여덟 왕자(정실인 소현왕후 소생이 일곱이고, 열한 명은 일곱 후궁의 자식이다)와 단종이 원손이었을 때 조성한 태실이 함께 있다. 세종 20~24년(1442) 사이 조성돼 전국에서 가장 많은 수의 태실이 한자리에 모인 곳이다. 이후 왕위에 오른 단종의 태실은 가천면에 별도로 조성됐다. 태종의 태실도 용암면에 있어 성주에는 3곳에 태실이 존재한다.

성주 선석산 자락 세종대왕자태실은 한 자리에 가장 많은 태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성주 선석산 자락 세종대왕자태실은 한 자리에 가장 많은 태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세종대왕자태실로 올라가는 길에 소나무가 호위하듯 숲을 이루고 있다.
세종대왕자태실로 올라가는 길에 소나무가 호위하듯 숲을 이루고 있다.

태실의 기본 구조는 태를 넣은 항아리를 땅속에 묻고 기단석 위에 또 항아리 모양의 석물을 설치한 형태다. 그러나 역사의 변곡점에서 태실도 수난을 당한다. 이곳에 안치된 19기 중 14기는 조성 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지만, 5기는 기단석을 제외한 석물이 파괴돼 있다.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하고 단종 복위를 꾀한 금성대군과 안평대군을 비롯한 다섯 왕자의 태실이다. 반대로 왕위에 오른 세조의 태실에는 특별히 거북 받침의 비를 더해 놓았다.

주차장에서 태실에 이르는 길은 완만한 경사로 양편에 소나무가 호위하고 있어 푸근하기 그지없다. 이곳 문화해설사는 선석산에서 떨어진 봉우리가 홀로 봉긋한 모양이어서 연꽃으로 비유하면 씨방 자리에 해당한다고 일러준다. 세종실록에는 태실의 입지 조건에 대해 ‘땅이 반듯하고 우뚝 솟아 위로 공중을 받치는 듯 하여야만 길지가 된다…만 3개월을 기다려 높고 고요한 곳을 가려서 태를 묻으면 수명이 길고 지혜가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임금이 윤허한 자리이니 풍수지리로는 마땅히 명당일 텐데, 왕자의 운명이 극명하게 갈린 것을 보면 모두에게 좋은 터는 없는 듯하다. “몸이 끌리고 마음이 편안한 곳이 각자의 명당 아닐까요?” 해설사가 덧붙인 말이 명언이다. 세종대왕의 태실은 한양에서 보면 성주보다 한참이나 멀리 떨어진 경남 사천 곤명면에 있다.

세종대왕자태실 아래 조성한 생명문화공원. 조선 왕조 스물다섯 임금의 태실 모형으로 조성한 공원이다.
세종대왕자태실 아래 조성한 생명문화공원. 조선 왕조 스물다섯 임금의 태실 모형으로 조성한 공원이다.
세종대왕태실 수호 사찰인 선석사의 태실법당. 세종대왕의 뜻을 기리기 위해 한글 현판을 달았다.
세종대왕태실 수호 사찰인 선석사의 태실법당. 세종대왕의 뜻을 기리기 위해 한글 현판을 달았다.
태실법당 내부에는 불상대신 자모관음보살을 안치했다.
태실법당 내부에는 불상대신 자모관음보살을 안치했다.

태실 바로 아래는 태조부터 순종까지 조선 왕조 스물다섯 임금의 태실 모형을 배치해 생명문화공원을 조성했다. 화려하면 화려한 대로, 장식이 없으면 없는 그대로 했다. 조선 왕조의 흥망성쇠가 어렴풋이 드러난다. 공원 초입의 ‘태실문화관’에 들르면 태실에 대한 여러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다.

생명문화공원 위에는 선석사라는 사찰이 태봉을 바라보고 있다. 신라 효소왕1년(692)에 의상대가가 창건했다 전해지고, 조선 영조 때 태실 수호사찰로 지정됐다. 이 절에서는 대웅전보다 ‘태실법당’이라 쓴 한글 현판을 단 건물이 더 눈에 들어온다. 세종대왕과 연관된 태실을 관리하는 사찰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근래에 지은 전각이다. 법당 내부에 흔히 보는 불상대신 아이를 안고 있는 ‘자모관음보살’을 안치한 것도 이 법당만의 특징이다. 전각 외부 기둥에 쓰는 글귀, 주련(柱聯)도 알기 어려운 한자가 아니라 한글로 장식돼 있다. 내용도 뜬구름 잡는 선문답이나 일방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베풀 줄 아는 사람’ ‘아름다운 마음씨’ ‘사랑의 홀씨’ ‘단아한 맵시’ 등 일상의 언어여서 더욱 친근하다.

성주=글ㆍ사진 최흥수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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