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암 연구기금을 모으기 위해 의족으로 대륙 횡단에 나섰던 캐나다 청년 테리 폭스(Terry Fox, 1958~1981)의 ‘희망의 마라톤(Marathon of Hope)’은 출발 143일 만인 1980년 9월 1일 온타리오 주 선더베이에서 중단됐다. 그는 이듬해에 폐암으로 숨졌고, 캐나다 국민과 세계인에게 깊은 여운을 남겼다.
당시 14세 소년 스티브 펀요(Steve Fonyo, 1965~)도 뉴스로 중계된 폭스의 마라톤을, 그의 성취와 좌절을 지켜보았다. 그도 12세 때 골육종으로 왼쪽 다리를 잃고 의족에 적응해가던 때였다. 그가 폭스의 마라톤 바통을 잇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때와 구체적인 동기는 알 수 없다. 어쨌건 그는 어느 날 밤 ‘에피파니(Epiphany)’같은 생각에 사로잡히게 됐다고 훗날 말했다. 발병 전 만능 스포츠맨이던 폭스와 달리 그는 운동에 특별한 재능도 흥미도 없었지만, 자기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고 한다. 먼저 의사에게, 그리고 가족에게 자신의 뜻을 밝혔고, 다들 너무나 뜻밖에도 그를 격렬하게 격려했다고 한다. 1984년 3월 31일, 그는 얼마간 얼떨결에 폭스와 같은 구간인 대서양 세인트존스 -태평양 빅토리아 구간을 달리는 자신의 마라톤 ‘삶의 여정(Journey of Lives)’을 시작했다.
처음이 아니어서 미적지근하던 반응은 그가 폭스의 마라톤이 멈춘 선더베이를 넘어서면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425일 만인 1985년 5월 29일 7,924km를 달려 태평양에 닿았고, 항암기금 1,400만 캐나다달러를 모금했다. 그가 닿은 항구와 해안은 그의 이름을 따 ‘펀요 비치’라 불리게 됐고, 토론토와 오타와 위니펙 등 여러 도시가 ‘펀요의 날’을 선포했다. 그는 조지 해리슨과 찰스-다이애나 황태자 부부를 만났고, 영예로운 시민에게 수여하는 국가훈장(Order of Canada)을 최연소로 수상했다.
30대 이후 그의 이미지는 추락했다. 폭행, 절도, 수표 사기, 음주ㆍ무면허 운전 등 잇따른 범죄로 구류를 살거나 보호관찰 명령을 받았고, 2009년 말 훈장마저 박탈당했다. 그의 마라톤 전후의 삶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제작되기도 했다. 그는 2015년 한 잡지 인터뷰에서 “마라톤은 내가 살면서 해낸 최고의 일이지만 내가 저지른 가장 커다란 실수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그도, 여운을 남겼다. 최윤필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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