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왼쪽) 감독이 영화 '기생충'으로 25일(현지시간) 제72회 칸국제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후 프랑스 유명 배우 카트린 드뇌브와 포즈를 취하고 있다. 칸=AP 연합뉴스

1990년대 한 TV드라마를 보다 쓴웃음을 지었던 기억이 있다. 중년의 영화감독이 촬영이 끝난 후 스태프와 함께 한 술자리에서 “가자, 칸으로”라며 호기롭게 외치는 대목 때문이었다. ‘아무리 드라마라지만 술주정을 적당히 해야지’라고 생각했다. 당시 칸국제영화제는 한국 영화인에겐 오르지 못할 나무로 여겨졌다. 전 축구국가대표 박지성이 영국 명문 구단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이적설이 돌 때 “알렉스 퍼거슨 감독 전화 기다리냐”며 놀렸다는 대표팀 선배와 비슷한 심정이라고 할까. 칸영화제는 영화인 뿐만 아니라 한국 영화 팬들에게도 ‘영화 선진국 클럽’의 행사쯤으로 인식됐다.

그럴 만도 했다. 칸영화제는 유난히 콧대가 높았다. 1999년 52회를 치르기까지 영화제의 꽃인 경쟁부문에 한국 영화를 단 한 차례도 초대하지 않았다. 간혹 한국 영화에 눈길을 주던 베를린국제영화제나 베니스국제영화제랑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2000년대 들어 분위기는 돌변했다. 칸영화제는 한국 영화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경쟁부문에 한국 영화를 부르기 시작했고, 상까지 잇달아 안겼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1980년대 초반 대학가엔 영화동아리 창립 바람이 불었다. 사회 변혁을 꿈꾸던 대학생들은 영화의 힘에 주목했다. 소득 수준 향상으로 단편영화 제작이 좀 더 용이해졌고, 집단 창작이 곳곳에서 이뤄졌다. 수많은 20대가 미래의 영화인을 꿈꿨다. 1984년 영화진흥공사(현 영화진흥위원회) 산하로 설립된 한국영화아카데미는 이들 미래 영화인들을 품는 교육기관 역할을 했다. 영화 ‘그때 그 사람들’(2005)과 ‘하녀’(2010) 등을 만든 임상수 감독, ‘1987’(2017)의 장준환 감독, ‘만추’(2011)의 김태용 감독 등 많은 영화인들을 배출했다. ‘기생충’으로 제72회 칸국제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88학번 봉준호 감독도 이곳에서 영화 실무를 공부했다.

야심만만한 우수 인력이 쏟아질 때 마침 한국 영화 시장은 1970~80년대의 오랜 동면을 끝내고 확장세였다. 삼성과 대우 등이 1990년대 들어 영상산업에 잇달아 진출하면서부터다. 제일제당(현 CJ)도 그 중 한 곳이었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로 많은 기업들이 충무로에서 철수했지만, 대기업은 한국 영화 산업화의 기초를 닦았다. (감독의 창의성은 예전보다 존중받지 못하고, 멀티플렉스체인에선 특정 대형 영화만 상영되는 그림자도 분명 짙지만) 탈세에 악용되던 주먹구구 회계 관행이 고쳐졌고, 감독 심기에 따라 좌지우지되던 촬영 현장에도 체계가 잡히기 시작했다. 우수 인력이 체계적인 제작 시스템과 든든한 돈줄을 만나 좀 더 완성도 높은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열렸다. 김영삼 정부와 김대중 정부는 영상산업을 미래 먹거리로 생각했고, 정책으로 적극 지원했다.

1996년 국내 최초의 국제영화제인 부산국제영화제가 출항했다. 부산영화제는 한국 영화가 세계로 나가는 창구 역할을 했다. 한국에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던 유럽의 유력 영화인들이 부산을 찾았고, 때마침 앞다퉈 나오던 우수 한국 영화에 눈길을 두게 됐다. 2000년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이 한국 영화 사상 처음으로 칸영화제 경쟁부문 레드카펫을 밟게 된 건 부산영화제 출범과 무관치 않다. 2002년 ‘취화선’(감독 임권택)의 칸영화제 감독상 수상, 2004년 ‘올드보이’의 심사위원대상 수상 등 이어진 낭보는 부산영화제를 다리로 한 ‘영화 외교’ 활동이 적잖이 작용했다. 요컨대 ‘기생충’의 황금종려상 수상은 한국 영화계가 오래 공들이며 협업해서 나온 결과물이다.

‘기생충’의 황금종려상은 평범한 진리를 새삼 일깨워준다. 우수 인력과 거대자본의 진출,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등이 맞물리면 영화가 아닌 다른 분야에서도 ‘황금종려상’ 수상이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라제기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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