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지너’는 현상부터 근원까지 이야깃거리를 몽땅 끄집어 내고 싶은 <한국일보>의 멀티 플랫폼 스토리텔링 콘텐츠입니다. 텍스트, 비디오, 데이터 등등. 가능한 모든 도구로 사람과 사회, 역사와 현상을 연결지어 보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2주에 한 번, 일요일 오전에 찾아 뵐게요.
◇‘악당’의 탄생
화창했던 그 토요일은 열아홉 번째 생일 하루 전날이었습니다. 초여름 같은 낮의 열기가 한풀 꺾이고 있던 2016년 5월 28일 오후 5시55분, 청년은 외출을 나가거나 혹은 귀가하는 시민들이 타고 있었을 지하철에 치어 숨졌습니다. 수리하던 지하철역 승강장안전문(스크린도어) 안쪽에서 꼼짝없이 생을 마감한 그의 곁에는 가방 하나가 덜렁 남았습니다. 기름때 묻은 장갑과 마스크, 드라이버와 스패너 따위의 공구 옆에 포장을 뜯지 않은 컵라면 한 개와 나무젓가락, 스테인리스 숟가락이 있었습니다. 고단한 일상과 허기가 가득했던 가방. 새파랗게 젊어서 더 비정했던 죽음을 목격한 우리는 누가 그를 죽였는지 묻고, 찾았습니다.
나흘 후 뉴스에서 ‘메피아’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서울지하철 1~4호선을 관리했던 ‘서울메트로’와 부패범죄집단을 상징하는 ‘마피아’의 조어였죠. 알고 보니 그 청년, 김군이 다녔던 은성PSD라는 회사는 서울메트로를 다니다 옮겨온 ‘낙하산’ 직원이 득실대는 곳이었습니다. ‘김군 같은 비정규직은 매달 최저임금 수준만 받으면서도 부족한 인력 탓에 허덕이는데 그 낙하산들은 2배가 넘는 월급을 받고 온갖 특혜를 누렸다’는 기사가 급속히 퍼지면서 메피아라는 별칭이 붙었습니다. 부끄럽지만 한국일보도 동참했습니다.
메피아라는 말은 ‘위험의 외주화’ 같은 추상과 추상이 만난 단어와는 차원이 다른 힘을 발휘합니다. 귀에 쏙쏙 박혔던 이 세 글자는 잘 보이지 않던 범인의 실체를 보이게 만드는 것 같았습니다. 메피아는 순식간에 김군을 죽음으로 몰아 넣은 주범으로 지목됩니다. 서울시는 특단의 대책을 마련하겠다며 이 메피아들을 사실상 해고합니다. 억울한 죽음의 실체가 드러나고 정의를 실현할 방향이 보이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2018년 9월 법원에서 반전이 일어납니다. “주문, 서울교통공사(구 서울메트로)는 (메피아로 찍혀 사실상 해고됐던) 원고들에게 고용의 의사 표시를 하라.” 당시 서울시의 조치가 잘못됐으니 복직을 시켜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죠. 어떻게 된 걸까요. 오늘 ‘오리지너’는 3년 전 우리가 찾았던 ‘악당’, 메피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컵라면
공기업 직원이 될 수도 있다는 희망으로 버텨온 8개월이었습니다. 서울지하철 1~4호선의 97개 역, 7,664개의 스크린도어를 관리하던 은성PSD에서 실업계고 3학년이던 김군이 2015년 10월 실습생 신분으로 첫 달을 일하고 손에 쥔 돈은 49만9,000원. 이듬해 봄이 돼서도 최저임금을 겨우 웃도는 140만원 가량을 받았습니다. 입사자 10명 중 5명은 채 6개월이 되기도 전에 고된 업무를 못 이기고 뛰쳐나가는 은성PSD였지만, 김군은 버텼습니다.
사고가 난 그 날도 시작은 비슷했습니다. 평범하게 고된 날이었죠. 오후 1시쯤 은성PSD의 강북사업소에 출근해 달랑 6명의 인원이 9시간 동안 지하철역 49개의 스크린도어를 관리해야 합니다. 자신에게 먼저 할당된 4개 역의 점검을 마친 후 사업소에서 대기하던 김군은 ‘지하철 2호선 구의역의 강변역 방면 스크린도어 장애 현장으로 가라’는 지시를 받습니다. 스크린도어 작업 현장에는 항상 2명이 있어야 한다는 규칙은 그날도 있으나마나 했습니다. 턱없이 부족한 인원 탓이었습니다. 한 직원이 같은 시간에 두 개의 역에서 정비를 했다며 기록이 조작되는 일도 비일비재했으니까요.
2015년 강남역에서 정비원이 작업 중 사망한 후부터는 스크린도어 열쇠 관리도 철저히 해야 했지만 지켜지지 않은 건 마찬가지였죠. 그 날 김군이 구의역 사무실에 도착해 스크린도어 열쇠를 가지고 나갈 때도 관리 감독 책임이 있는 서울메트로 직원 누구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지하철 배차 간격인 3~6분 안에 장애 조치를 마쳐야 하는 김군은 혼자 다급하게 움직였습니다. 이상신호가 감지된 곳이 몇 군데 있었지만, 아마도 승강장 9-4 지점 스크린도어가 말썽이지 싶었죠. 그날 하루 동안만 14번이나 고장이 난 골칫거리였으니까요. 쉴새 없이 지하철이 다니는 선로에 설치된 장비라면 당연히 신경을 써서 만들었을 텐데 습기나 먼지 때문에 수 없이 고장이 나는 걸 좀체 이해할 수 노릇이지만, 어쨌든 빨리 고쳐야 합니다. 오후 5시 53분, 9-4 지점 앞에 선 김군은 잠시 전화 통화를 합니다. 을지로4가역에도 장애가 발생했다는 소식에 고심하던 김군은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먼저 도착하는 사람이 연락을 주기로 동료와 약속합니다. 김군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었습니다.
스크린도어 문을 열고 들어간 오후 5시55분33초, 김군은 장애물감지센서 청소를 시작합니다. 3초 후인 오후 5시55분36초, 김군은 역으로 들어오던 제2350 열차와 충돌합니다. 열차가 역으로 들어서던 그 찰나에 기관사는 “작업자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신체의 일부로 추정되는 물체를 봤다”고 합니다. 그 때 열차와 김군의 거리는 대략 20~25m가량. 기관사는 기적장치를 울리고 제동장치를 작동했지만 열차는 9-4 지점을 한참이나 지난 승강장 4-2 지점에 가서야 멈춥니다. 김군은 인근 대학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밥 먹을 시간도 부족해 짬이 나면 끼니로 때우려던 컵라면이 그의 가방에 남았습니다.
그날 저녁 서울메트로 측은 “김군이 역무실에 혼자 와서 두 명이 왔다고 말하고 안전문 열쇠를 가지고 나갔다”고 밝혀 김군의 책임을 부각시킵니다. 이튿날 김군의 어머니는 구의역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마이크를 잡고 오열합니다. “우리 아이 잘못이 아닌 걸 제발 좀 밝혀주십시오. 그래야지 제가 우리 아들 원통함을 풀고 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고에는 원인이, 사건에는 책임자가 있죠. 그 날 김군에게 벌어진 일의 원인은 사람들에게 ‘위험의 외주화’라는 낯선 단어로 분석됩니다. 서울메트로가 업무를 쪼개 은성PSD에 위탁을 맡기는 과정 곳곳에 사람의 생명이 왔다갔다하는, 잔인하고 무책임하며 무능하기까지 한 결정들이 있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창의혁신 구조조정’이니 ‘공기업 경영혁신’ 같은, 어딜 봐도 옳을 것만 같은 명분과 위험의 외주화가 때때로 동의어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는 더 어려웠습니다. 언론 보도를 위시한 여론은 메피아라는, 명확하고 단순하고 쉽게 특정되는 이들에게 책임을 묻는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자부심 가득한 공기업 사원에서 메피아로
한성부(가명ㆍ64)씨는 지금도 2011년 여름을 자주 회상합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2016년 5월 김군의 사고 후 과거를 후회하는 날이 부쩍 늘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서울메트로는 한씨에게 참 좋은 직장이었습니다. 1980년대 초반 공채로 공기업에 입사한 자신이 대견했다는 그는 대기업 사원에 버금가는 대우를 해주는 일터에 만족했습니다. 군사정권 시절 퇴역 군인들이 고위 관리직으로 오면서 군대 같은 조직문화가 한동안 지속됐던 것만 빼면 말이죠. 그런 문화도 민주화 운동 시기를 거치면서 많이 개선됐다고 합니다. 한씨도 모두가 거리로 나설 때 함께 하면서 노동 조건 개선의 성취를 이뤘던 옛날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지하철 역사의 기계 설비 유지ㆍ관리 일을 담당했던 한씨는 큰 어려움 없이 생활했습니다.
2011년 8월 한씨와 동료들은 선택의 기로에 섭니다. 스크린도어 유지ㆍ관리를 담당할 외주업체 은성PSD로 직장을 옮기는, 즉 전적자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나서 입니다. 자랑스럽게 여겼던 공기업 직장을 스스로 떠나 하청업체나 다름 없는 외주업체로 옮길 이유는 없었습니다. 전적자에 대한 처우 조건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죠.
한씨 눈에 들어온 건 전적 할 경우 임금은 60~80% 수준으로 줄지만 당시 58세였던 서울메트로의 정년보다 2~3년 가량 더 일할 수 있도록 고용을 보장하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집에 어른은 모친과 주부였던 아내뿐이었습니다. 아직은 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학업을 거의 마칠 때쯤이었지만 언제 취직이 될지 모르는 1남 1녀를 위한 뒷바라지도 계산에 넣었죠. 전적을 하면 명예퇴직금으로 목돈을 마련할 수 있다는 유혹도 뿌리치기 어려웠습니다. 30년 가까이 일하고 받은 목돈이란 5,000만원이 좀 안 됐지만 말입니다. 그래도 가족과 자신의 미래를 놓고 셈을 해본 한씨는 은성PSD로 옮기기로 결정합니다.
그로부터 4년 후.
“성명서… 서울시와 서울메트로는 과거 경영합리화라는 명목 하에 부실하게 추진된 스크린도어 유지보수 민간 위탁과 비정규직의 양산을 즉시 중단하고, 시민 안전과 열차의 안전운행을 위협하는 스크린도어 외주용역을 즉시 철폐하고 직영화에 나설 것을 촉구한다. 2015년 스크린도어 전적자 모임 및 비정규직 일동.”
한씨는 새 직장 은성PSD에서 ‘싸움꾼’이 돼가고 있었습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요. 그는 “서울메트로가 약속한 것과 다르게 근무 환경이 너무 열악했다”고 했습니다. 은성PSD로 전적했다는 것은 그가 ‘서울메트로 정직원-서울메트로 출신 은성PSD 정규직-은성PSD 정규직-김군 같은 은성PSD 비정규직’으로 이어지는 피라미드 구조에서 한 계단 계급이 떨어졌다는 걸 의미했습니다. 그때도 서울의 어느 지하철역에선가 함께 일하고 있었지만, 서울메트로에 남은 옛 동료들은 ‘갑’, 은성PSD로 옮긴 이들은 ‘을’이 됐다는 현실을 부정하기 힘들었습니다. 해가 가면서 3,000만원이 넘게 벌어지기 시작했던 연봉 차이를 보여줬던 명세서가 그 사실을 입증했습니다. 서울메트로 측은 직원들에게 “외주업체(은성PSD) 직원들에게 직접 지휘ㆍ명령을 할 경우 불법파견으로 판정될 위험이 있으니 주의하라”는 지시를 하기도 합니다.
2008년을 기점으로 이명박 정부와 오세훈 시장의 서울시가 그토록 강조했던 경영효율화, 합리화라는 기치는 공무원 사회에서 거역하기 힘든 흐름이었습니다. 그 아래에서 추진된 인원 감축과 외주화. 이제는 한씨도 그것이 그저 ‘보여주기’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공공부문 선진화라는 명분아래 허울뿐인 기준으로 인원 감축 목표치가 설정되고 서울메트로를 비롯한 공기업들은 어떻게든 직원 수를 줄이려 안간힘을 씁니다. 사실 한씨가 회사를 옮겼던 2011년 외주화 바람을 맞은 건 스크린도어 부문 말고도 전동차 중정비ㆍ차량기지 정비 부문 등이 있었지만, 스크린도어 부문만 떨어져 나왔습니다. 당시 스크린도어 부문만 담당할 외주업체가 비어 있어서 서울메트로 직원을 보낼 수 있었기 때문이죠. 결국 서울시가 주장했던 효율화란 다른 외주업체 일자리에 자기 직원들을 채우는 걸 의미했고 그마저도 여의치 않자 가장 만만한 스크린도어 부문이 선택됐습니다. 한씨 자신을 비롯한 전적자들은 그 생색내기 실적을 채워줄 숫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한씨의 월급 절반에도 못 미치는 돈을 받으면서 일했던 김군 같은 이들은 을도 아닌 ‘병’이나 ‘정’, 혹은 그보다 더 아래에 있었죠. 갑 아래 을, 병, 정들은 그렇게 2인1조라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도 박탈 당한 채 육중한 열차가 달려드는 일터로 내몰렸습니다.
김군 사고 날, 비번이었던 한씨는 서울 노원구 석계역 부근에서 같이 서울메트로를 떠나왔던 직장 동료를 만나고 있었습니다. “뭐, 회사 얘기했죠. 은성PSD가 서울시랑 재계약을 했는데 앞으로 더 힘들어 질 거 같다, 2인1조 문제나 처우 문제로 반항하는 직원들을 징계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으냐, 우리가 왜 여기로 옮겨서 이 고생을 하느냐. 그런 얘기를 하다가 김군이 사고가 났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지하철을 타고 바로 병원으로 갔어요.”
그리고 며칠 후 한씨와 전적자들은 메피아가 됐습니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현장을 살피지 못했던 자신의 책임에 대해 사과를 하고, 대중교통의 안전 관리를 비용 절감과 경영 효율의 관점에서만 보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이어서 주요 보직자들을 경질하는 한편 “메트로 퇴직자 채용을 의무화하는 계약서 상 특혜 조항을 모두 삭제함으로써, 원천적으로 메피아를 척결하겠다”고 선언합니다. 서울시는 그 해 6월 은성PSD와의 계약을 연장하지 않는 방식으로, 한씨를 비롯한 전적자 30여명을 사실상 해고합니다. 80년대 민주화 운동 대열의 끝에서 함께했던 한씨는 30여년 만에 처음으로 서울시를 규탄하고 복직을 요구하는 시위 대열에 합류합니다. 소용 없었습니다. 억울함을 풀어보려 다른 동료 33명과 함께 법원으로 갑니다.
◇피고 서울교통공사는 원고들에게 고용의 의사 표시를 하라
메피아가 벌인 부조리극으로 김군이 희생됐다는 여론재판조차 가물가물해진 2018년 9월 13일. 서울중앙지법은 한씨와 그 동료들에게 작은 위안이 된 판결을 내립니다. “막노동도 하고, 여기 저기 일을 찾아 다녔어요. 지금도 일을 해요. 그 때 2인1조 규정 지키라고, 전적자와 비정규직 모두 처우 개선하라고 앞장섰던 한 동료는 김군 사고 얼마 후에 폐암으로 돌아가셨어요. 자식들이 소송에 대신 나섰어요.”
새파란 청년을 죽음으로 몰고 간 원흉으로 취급 받았던 원고들에게 법원이 내린 판결은 2년이란 시간이 무색하리만치 간단하고 명료했습니다. △원고들은 서울메트로 소속 직원으로서 안정적으로 근무했던 서울메트로를 떠나 위탁 받은 회사로 전적할 별다른 이유가 없었다 △서울메트로는 직원들에게 정년 및 보수 보장, 신분 및 고용 보장 등 유인을 제공하려 했으며 전출할 경우 총소득이 많아진다는 점을 강조했다 △서울메트로의 약속은 전적 회사(은성PSD)에서 근무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면 서울메트로가 고용을 승계해 원고들의 연장된 정년까지 보장하기로 한 것으로 볼 수 있고 △서울메트로와 은성PSD와의 계약이 종료된 경우라고 해도 적용된다. 당시 서울시로부터 메피아로 낙인 찍혀 거리로 나앉게 된 다른 외주업체 전적자들의 재판도 비슷한 결과를 내놓고 있습니다.
하지만 서울교통공사는 당시 고용 보장 약속은 전적 회사가 파산하거나 계약이 해지될 경우에만 해당될 뿐 은성PSD 경우처럼 계약이 만료된 경우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항소를 했습니다. 원고들은 곧 선고를 앞둔 2심 재판부도 자신들의 손을 들어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판결문에는 원고들과는 별개로 서울시가 사실상 해고됐던 일부 전적자를 이미 복직시켰다는 사실도 드러납니다. 한씨 등 원고들이 주장하는 것보다 훨씬 후퇴한 조건으로 복직했다고는 하지만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사실상 해고를 했으면서도 일부나마 다시 복직을 받아들인 것은 이들을 김군 사고 책임의 한 축이자 메피아로 지목했던 과거의 판단이 잘못됐다고 인정하는 방증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한씨를 비롯한 다른 노동자와의 소송은 왜 계속 이어나가는지도 의문입니다.
메피아 비난이 빗발치는 속에서 이들의 변호를 맡았던 노동법률원 ‘새날’의 김기덕 변호사는 “한씨를 비롯한 이들도 외주화의 피해자”라고 말합니다.
“저는 노동사건 중에서도 노동자 측 변호만 해 왔습니다. 이명박 정권의 구조조정 관련 사건도 쭉 해왔구요. 이 분들도 희생자라고 생각해요. 외주화 책임은 서울메트로에 있는 건데 엉뚱하게 외주업체에 김군 사고의 책임을 물은 겁니다. 그것도 사장이나 경영진에게 큰 책임을 물었으면 모르겠는데 노동자들에게 책임을 씌우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보고 사건을 맡았어요. 이건 마치 대기업 하청업체가 있는데 그 안에서 정규직 노동자를 비정규직과 비교하면서 귀족노동자라고 몰아붙이는 거랑 전혀 다르지 않아요.”
서울시뿐만 아니라 당시 한국일보를 비롯한 언론의 보도에 대해서도 탄식했습니다. “우리 언론이 그런 경향이 있는 거 같아요. 한 방향으로 다 쏠리는. 저도 기고도 하고 그랬는데 한 번 (메피아로) 잡힌 방향은 다시 틀기가 어렵더라구요.”
◇그 후 3년
2008년 무렵부터 마치 시대정신처럼 유포된 공기업 경영혁신의 본질은 결국 돈이었습니다. 서울에서만 서울메트로와 도시철도공사 등 5개 공기업 인력 3,400여명을 줄여서 인건비 1,800억원을 절감하겠다는 게 골자였죠.
사실 서울지하철의 재정 상황을 획기적으로 개선하고 만성적인 적자를 극복하는 방법은 매우 쉽습니다. 국가유공자나 장애인, 특히 65세 이상 노인들에게 제공되는 무임승차 서비스를 중단하면 됩니다. 2018년 무임승차로 인한 손실액은 3,540억원. 전체 적자(5,390억원)의 65.7%를 차지했습니다. 공기업도 기업이니까 이윤 추구를 지상의 과제로 삼고 ‘혁신적으로’ 적자를 줄이기 위해 무임승차를 폐지하면 어떻게 될까요. 노인 무임승차로 발생하는 적자의 크기는 반대로 노인들이 공공서비스로부터 누리고 있는 이익의 크기를 말합니다. 누군가 세금을 빼돌린 게 아니라면, 공기업의 방만한 경영이나 적자를 논하기 이전에 공공서비스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고 그 목적에 맞게 운영되는지를 먼저 따져야 하는 게 아닐까요. 2016년 5월 28일 김군 곁에서 그를 안정적으로 지켜줄 동료 한 사람을 더 두기 위해 더 많은 세금을 쓰는 걸 낭비라고 할 수 없는 것처럼요. 김군이 세상을 등진 지 3년. 메피아라는 악당이 실은 악당이 아니었던 것으로 뒤늦게 밝혀지고 있는 지금, 우리는 다시 그 죽음의 원인을 생각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2019년 5월 22일 오리지너와 처음 통화를 했던 한씨는 두 번이나 인터뷰 약속 시간을 바꿨습니다. 일과시간을 피해 저녁 8시가 좋겠다고 했다가 수도권 인근에서 오후 2시쯤 시간을 낼 수 있겠다고 했다가 그마저도 어렵다고 했습니다. 결국 23일 오전 6시30분 80여분간 이어진 전화 인터뷰로 갈음한 그는 “기사가 나가면 지금 다니는 직장에서도 불이익을 당할 것 같아 두렵다”며 자신의 구체적인 입사연도 이름을 가려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인터뷰 말미에 물었습니다.
오리지너 “그래도 그 당시에는 김군보다 많은 월급을 받고 나은 대우를 받으셨는데 잠시라도 미안하다는 생각을 하신 적이 있나요?”
한씨 “저희도 사실 같은 위험에 처해 있었어요. 그런데 저희는 오래 했으니까, 경험도 많고. 위에서 위험한 지시를 하면 버티기도 하고 ‘두 사람이 해야 하는데 왜 한 사람만 보내냐, 사고 나면 어떻게 하냐’고 엄청나게 항의도 하고 그랬는데 김군은…”
오리지너 “혹시 유족분들과는 그 후 연락을 한 적이 있나요. 가장 오해를 풀고 싶은 분들이 김군의 가족이었을 것 같습니다.”
한씨 “그 분들도 잘 알 거예요. 언론에서 비정규직보다 임금도 많이 받고 전관예우를 받았다고하니까 그렇게 보셨을 수도 있지만…메피아가 (김군 죽음에) 영향을 줬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실 거예요. 유족분들과 접촉해 볼 기회는 없었어요.”
명예를 지키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고, 법원에서도 손을 들어줬지만 한씨는 유족들이 오해하지 않길 바라는 자신의 바람만 늘어놓을 뿐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이상, ‘오리지너’였습니다.
조원일 기자 callme11@hankookilbo.com
김창선 PD changsun91@hankookilbo.com
자료조사 박서영 solucky@hankookilbo.com
최한솔 인턴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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