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필리핀 미국 대사 “미국의 화웨이 우려 심각한 수준”
미중 무역 갈등이 심화하는 가운데 22일 홍콩에서 열리고 있는 ‘2019 클라우드 엑스포 아시아’에 참가한 화웨이의 부스. 홍콩=EPA 연합뉴스

일본과 대만에 이어 영국까지 전 세계 주요 정보기술(IT) 기업들이 탈(脫)화웨이 대열에 속속 합류하고 있다. 당초 미국이 화웨이와의 거래 중단 결정을 내렸을 때만 해도 중국과의 무역전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려는 압박전술로 여겨졌다. 하지만 미국의 공세 수위가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사실상의 ‘화웨이 죽이기’로 해석되면서 개별 기업들이 화웨이를 버릴 수밖에 없다는 현실적 판단을 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 워싱턴포스트(WP)는 22일(현지시간) “미중 간 충돌이 결국 각국 기업들로 하여금 화웨이를 버리느냐 마느냐의 선택지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면서 “유럽의 주요 IT 기업들이 화웨이와의 거래를 보류했다”고 전했다. 실제 영국 BT그룹 산하 최대 이동통신사인 EE는 이달 말부터 영국 6개 도시에서 화웨이의 5G 스마트폰을 판매하려던 계획을 백지화했다. 영국의 세계적 반도체 설계업체로 화웨이에 핵심 반도체를 공급해온 ARM도 화웨이와의 사업을 중단하기로 했다. ARM 측은 “우리의 지식재산권은 미국의 보호를 받는다”면서 “따라서 미국 정부의 수출 정책을 따라야 한다”고 설명했다.

일본 기업들도 속속 화웨이를 등지고 미국에 투항하고 있다. 파나소닉은 화웨이 제품에 대한 미국 정부의 수입금지 조치에 따라 대상 제품과 관련해 화웨이와의 거래를 중단하기로 했다고 NHK방송과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 등이 23일 보도했다. NTT와 KDDI, 소프트뱅크 등 일본의 3대 이동통신업체들도 이날 화웨이 스마트폰 신제품 발매를 무기한 연기하거나 예약 정지를 발표한 상태다. 대만에선 중화텔레콤 등 5곳의 이동통신사가 전날 화웨이의 신규 스마트폰 판매를 중단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같은 흐름은 미국의 화웨이 거래 중단 압박이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화웨이를 둘러싼 미중 간 갈등이 무역 경쟁의 수준을 넘어 4차 산업혁명의 핵심기술을 둘러싼 패권 다툼으로 치닫자 IT 분야 기업들도 경제적 판단이 아닌 정치적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을 것이란 분석이다.

실제 미국의 외교적 압박은 갈수록 노골화하고 있다. 성김 주필리핀 미국 대사는 이날 케손에서 열린 한 포럼에 참석해 “화웨이에 대한 미국의 우려는 매우 심각한 수준”이라며 “미국의 우방이거나 동맹관계인 국가들은 미국의 우려를 공유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미국의 고위 외교관이 공개석상에서 주재국인 필리핀을 포함한 주변국을 향해 화웨이와의 거래를 끊으라고 대놓고 압박한 것이다.

앞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책사로 불렸던 스티브 배넌 전 백악관 수석전략가도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와의 인터뷰에서 “(화웨이와의 거래를 사실상 중단시킨) 트럼프 대통령의 행정명령이 미중 간 무역협상보다 10배는 더 중요하다”면서 “화웨이가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의 국가안보를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조영빈 기자 peoplepeopl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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