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양동시장 ‘대동톱상사’ 조충제 대표
광주 양동시장은 호남지역 최대 규모의 재래시장이다. 광주ㆍ전남에서 농수산물은 물론 가구와 한복, 이불, 옷, 식기 등 가재도구 등이 유통되는 이 곳에는 50여년을 훌쩍 넘긴 가게가 상당수다. 특히 이들 중엔 지금은 거의 사라진 독특한 기술을 가진 장인들이 운영하는 노포들도 많다.
무등산에서 발원한 광주천을 따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광주시청 방향으로 걷다가 중간쯤에 위치한 양동시장 초입에 들어서면 새벽부터 들여오는 쇠를 다듬는 소리가 귓전을 울린다.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만큼 작지만 정겨운 쇠소리가 나는 곳은 호남에서 유일하게 톱을 제작하는 대동톱상사다. 평생 톱을 만들어 온 ‘수제톱 장인’ 조충제(75)씨의 생활터전이기도 하다. 조씨를 ‘장인(匠人)’이라고 칭한 것은 호남에서 톱을 직접 만들고 수리하는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지난 57년간 한 눈 팔지 않고 톱 제작이란 한 길을 걸어온 공로를 인정받아 오는 30일 열리는 제1회 ‘대통전통문화상’ 특별상 한우물상부문 수상자로 선정됐다.
광주 북구 누문동 광주천변에 위치한 대동톱상사는 지난 70년대부터 지금까지 양동시장을 지키고 있다. 톱 제작소라고는 하나 외관상으로는 어느 철물점이나 다름이 없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당당한 체격의 노신사가 반겼다. 15평 남짓한 가게엔 온통 그가 제작한 톱으로 가득했다. 진열대에는‘大同(대동)’이라고 인쇄된 빨간 포장지에 싸인 크고 작은 톱들이 손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빼곡하게 쌓여있었다.
“이 곳에 진열된 톱의 종류만 100여종입니다. 가계 1층과 2층 다락 창고에 보관하고 있는 톱을 전부 합하면 1만자루는 족히 될 것입니다.”
1층 판매대에는 나무를 자를 때 쓰는 일반톱이 대부분을 차지했지만 대나무를 작업에 쓰는 대톱과 문살 등 얇은 목재를 자를 때 쓰는 등대기톱 등 수많은 종류의 톱이 진열됐다. 그는 성인 키만큼 길어 전동기구를 가지고 갈 수 없는 높고 깊은 산 등에서 아름드리 나무를 자를 때 쓰는 띠톱, 손잡이와 톱날이 이어 길이가 2m에 달하는 가지치기톱, 얼음을 자를 때 쓰는 얼음톱 등 자신이 직접 도안하고 만든 톱들을 한동안 소개했다. 특히 우리 고전 ‘흥부와 놀부’전에서 박을 타는 대목에서 나오는 탕개톱을 설명할 때는 대단한 그의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요즘 전국에서 탕개톱을 직접 만든 사람은 나 외에는 거의 없을 겁니다” 요즘 탕개톱을 찾는 사람이 거의 없으니 만드는 사람도 없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평생 톱을 만드는 것을 숙명처럼 살아온 그는 언제 팔릴지도 모를 탕개톱을 들고 침이 닳도록 자랑했다.
조씨가 톱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62년 20대 초반. 기술을 가르쳐 주겠다는 이종형님의 권유로 톱을 만들기 시작했다. 형님 밑에서 10여년간 기술을 배운 그는 70년대 초반에 현재 위치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톱 공장을 세워 독립했다. 당시엔 양동시장과 가게 사이에 광주천이 흐르고 있었는데 그에게 뜻밖의 행운을 가져다 줬다. 개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양동시장 옆 광주천 복개공사가 시작된 것이다. 이어 복개상가 건설 공사까지 이어져 그야말로 공구판매에 대박이 났다. 복개상가 건설 현장에 수백명의 목수와 인부들이 투입되면서 대동톱상사의 톱은 그야말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여기에 70~80년대 건설경기 호조에 힘입어 전국에서 주문이 쏟아져 하루에 1,000자루 이상 톱이 팔려나갔다. 중간도매상들이 현금으로 선결제하고 주문할 정도였고, 강원, 경남, 경북, 제주까지 톱이 팔려갔다. 전국에 소문이 퍼지면서 단골 목수들이 생겼고 한 사람당 한번에 30~40자루 톱을 사가기도 했다.
그는 하루에 혼자서 200개를 만든 적이 있다고 털어놨다. 직원들이 쉬는 휴일을 앞두고 당시 군대에 물건을 납품하던 중간도매상이 전화해 모래까지 톱 200자루가 필요한데 만들 수 있겠냐고 물었다. 그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할 수 있다고 답하고 다음날 가게 문을 걸어 잠그고 새벽 4시부터 오후 10까지 톱 200자루를 만들어 납품했다고 말했다.
그에게 ‘무용담처럼 들린다’고 되묻자 실제 톱을 만들어 보였다. 먼저 강철판을 톱 모양으로 잘랐다. 작두를 이용해 서너번 자르니 톱 모양이 완성됐다. 이어 수동식 기계를 이용해 일정한 간격으로 톱니를 찍어냈다. 세번째 공정은 철로모양 모루 위에 톱을 놓고 작은 망치로 톱니를 위아래로 어김작업을 했다. 이어 톱을 고정시킨 뒤 줄을 이용해 톱날을 예리하게 세웠다. 톱 목에 고정쇠를 달고 손잡이를 끼우니 순식간에 완제품이 나왔다. 전체 공정이 5분 정도 밖에 걸리지 않아 그야말로 ‘뚝~딱’하고 톱이 만들어졌다. 그가 70대 중반임을 감안하면 20대 때 하루 200자루 톱을 만들었다는 사실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에게도 수많은 시련이 있었다. 80년대 초 갑자기 찾아온 악재들이 겹치면서 한때 공장을 닫아야만 했다. 톱이 한창 잘 팔릴 때는 직원 5~6명과 함께 하루 1,000여개를 만들어 팔던 그였지만 중간도매상으로부터 판매대금이 밀린데다 공장에 불이나 부도를 맞았다. 공장이 차압당하고 경매 위기까지 몰렸지만 주위의 도움으로 간신히 사업을 재개할 수 있었다. 부도를 딛고 현재 가게로 이전해 자리잡기까지 10여년간 눈물겨운 생활을 했다고 털어놨다. “그때는 경황이 없어 감사의 말도 못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너무 고마우신 분들입니다. 특히 어려운 형편에도 자식들(1남2녀) 대학까지 가르치고 가정살림 잘 꾸려준 집사람에게 미안하네요.”
한때 양동시장 인근에는 톱을 만들고 수리하는 가게가 5~6개 있었으나 대동톱상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자취를 감췄다. 기계톱과 대량 생산되는 일회용 톱이 나오면서 수제 톱을 사용하는 사람이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실제 일반 가정의 연료가 나무에서 석유와 가스로 바뀌면서 나무를 잘라 장작을 만들 때 쓰는 수제 톱을 기계톱이 대체했다. 또 주택이나 공사 현장에서 쓰던 양날톱 등은 다양한 기능과 작업효율이 좋은 각도톱 등 자동톱에 자리를 내주었다. 하지만 그는 “기계화되면서 수제 톱을 찾는 사람은 드물지만 제 톱을 써본 사람들 제 것만 고집해요. 손맛이 좋기 때문이죠”라고 자랑했다.
그는 요즘도 매일 새벽 4시면 출근한다. 대동톱상사를 개업한 후 그는 “돈 버는 건 1등 못해도 가게 문 여는 건 1등 한다”는 결심을 했다고 한다. 5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약속을 지켜오고 있다. 그는 일요일과 휴일에도 어김없이 문을 연다. 출근하면 잠시도 가게 밖을 나서지 않는다. 간혹 멀리서 자신의 톱을 사거나 수리하러 일부러 찾아오는 손님들이 있기 때문이다. 요즘엔 전통가옥 작업에 쓰이는 양날톱 수리가 많이 들어온다. 과거 양날톱은 한쪽은 자르고 다른 쪽은 켜는 날이 있었다. 하지만 요즘엔 켜는 날이 없이 나와 전문목수들이 켜는 날을 만들기 위해 가끔씩 멀리서 찾아온단다. 그는 한쪽 날을 작두로 잘라 내고 켜는 톱날을 직접 만들어 주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톱이 처음 사용된 시기는 삼국시대로 추정된다. 전남 나주시 반남면 고분군에서 톱이 출토된 것이 근거다. 톱은 나무나 쇠붙이를 자르거나 켜는데 쓰는 도구다. 조선시대부터 톱은 용도에 따라 자름톱(가로톱)과 켤톱(세로톱)으로, 크기에 따라 대톱, 중톱, 소톱으로 각각 구분한다. 톱의 모양이나 가공재질, 용도 등에 따라 양날톱, 등대기톱, 붕어톱, 대톱, 쇠톱, 돌림톱, 실톱, 칼톱, 손톱, 세톱 등으로 다양하게 불린다. 켤톱은 톱니 모양이 70도 기울어진 삼각형이고, 자름톱은 톱니가 정삼각형 모양을 하고 날을 좌우로 어김으로써 밀고 당길 때 공간을 만들어 나무를 쉽게 자를 수 있다. 얼음을 자를 때는 톱니가 큰 톱이 사용된다.
대동톱상사에 들어서면 마치 70~80년대에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분위기다. 그 흔한 컴퓨터도 없고 오래된 브라운관 TV와 전자계산기가 탁자에 놓여 있을 뿐이다. 그가 개업 이후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는 톱날을 찍어내는 기계와 절단기, 망치, 철로도막으로 만든 모루 등은 50년은 족히 넘었다. 그는 지금도 톱의 크기를‘한자 반(尺 5)’등으로 표기하고 있다. 20대 청년시절부터 배워온 기술과 표기법 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셈이다.
왜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냐고 묻자 “못 배웠으니까요”라고 답했다. 온라인 등 대량판매 방법을 생각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10여년 전까지 판매 걱정은 하지 않았고 하루 이틀 미루다 보니 오늘까지 와 버렸다”고 빙그레 웃어 넘겼다.
그는 지금도 톱만 보면 재미있고 마냥 행복하기만 하단다. ‘톱 만드는 것이 천직’이라고 했다. 하지만 딱 한가지 소원은 자신의 기술을 후계자에게 물려주는 것이란다. “앞으로 10년은 더 톱을 만든 수 있을 듯 한데 수입이 없으니 누가 기술을 배우겠냐”며 아쉬워했다. 그는 후계자 양성을 위해 국가나 시로부터 ‘장인’으로 지정되기를 원하고 있다. 장인 지정으로 기술지원금이 나오면 혹시나 전수자가 있을 수도 있다는 판단에서다. 이를 위해 지금까지 자신이 가지고 있던 각종 작품과 자료 등을 수집해 정리하고 있다. 그는 “여기저기서 장인 지정에 도움을 주시는 분들이 있어 힘이 난다”며 “언젠가는 이뤄지지 않겠냐”고 화답했다.
광주=글ㆍ사진 김종구 기자 sor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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