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양이를 용서한다니. 길고양이가 놀라게 하고, 겁주고, 할퀸 적이라도 있나? 신호등은 무슨 잘못을 했길래 용서받아야 할까. 학교 갈 시간이 급해 깜박이는 초록 불을 보고 숨차게 달려 가 횡단보도를 건너려는 순간, 얄밉게도 빨간 불로 바뀌었나? 용서해야 할 만한 상황과 이유를 큰 트럭과 자전거까지는 꿰맞춰보다가 누나며 날아가는 새며 구름에 이르러서는 그만 상상을 포기해버렸다.

마지막 두 행에 다다르자 맥이 빠지며 온 몸으로 비실비실 새어나오는 웃음. 아, 이 시의 어린이는 단어의 의미를 잘못 알고 있었구나. “남의 입장을 살펴 이해하거나 잘못을 덮어준다”는 의미를 지닌 ‘봐주다’라는 단어를 ‘보다’로 착각했다. ‘용서하다 = 봐주다 = 보아주다 = 보아 주다 = 보다’가 된 것. ‘보아주다’라는 단어를 가운데 두고 ‘용서하다’와 ‘보다’가 만나고 엮였다.

착각의 결과가 꽤 쓸모 있다. 쓴 맛 없고 찌꺼기 남지 않는 웃음이 나왔다. 오해된 언어에 맞추어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서술어 하나만 달라졌는데 전혀 새로운 언어의 세계가 펼쳐졌다. 문학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 중 하나다.

‘무지개가 뀐 방이봉방방’은 가수 김창완의 동시집이다. 시는 그 옛날 노래에서 발생했고 어느 때엔 노래와 하나였다는 예술론을 이제 그만 언급해도 되지 싶을 정도로 시와 노래는 가깝다. 많은 노래 가사에서 종종 시와 동시를 읽는다. 김창완은 동시집 한 권이라는, 오롯한 자신의 시 세계를 완성했다. 이 동시집은 유명인이라는 꼬리표를 떼고, 누구의 작품이라는 배경은 제쳐두고 작품만 꼼꼼히 따져 볼 가치가 있을 만큼 완성도를 갖추었다.

다만 단 하나 계속되는 의문은 이 동시집이 표상하는 어린이의 천진함이 과연 진짜 ‘어린이다움’일까 하는 점이다. 이 동시집의 ‘어린이다움’은 어린이 화자를 ‘아무 것도 모르는 존재’로 묶어둠으로써 가능했기에 더 그렇다. ‘봐주다’란 말의 뜻을 모르는 어린이여서 ‘용서’란 시가 나올 수 있었듯 말이다.

천진한 동시를 만날 때 나도 따라 천진해질 수 있으면 좋으련만 마냥 그럴 수가 없다. 어린이가 자신을 ‘아무 것도 모르는 존재’로 묶고 가두는 시를 어떻게 읽을지 생각해보게 되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어른이 ‘어린이는 이러하다’라고 믿고 싶어 하는 ‘어린이다움’이라면 그건 어린이의 문학이 아닌 어른의 문학이기 때문이다.

김유진 어린이문학평론가ㆍ동시인

web_cdn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