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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는 묘한 카타르시스를 주는 게임이다. 기대치 않던 임시선발이 상대팀 에이스를 상대로 완승하거나, 1할대에 허덕이던 타자가 역전 끝내기 홈런을 치면 카타르시스는 배가된다. 응원하는 팀을 떠나 경기 자체만 놓고 보면, 에이스들 간 팽팽한 투수전에서 번트 도루 진루타 등 세밀한 작전 야구를 펼치는 승부(스몰볼)도, ‘역시 야구는 홈런’이라며 시원한 장타로 점수를 펑펑 내는 경기(롱볼)도 각각 보는 재미가 상당하다. 야구팬들 사이에서는 짜릿함의 무게감을 놓고 스몰볼이냐 롱볼이냐는 의미 없는 논쟁을 심심찮게 벌인다.
최근 재정확대를 둘러싼 논란이 확대되는 모습을 보면서 스몰볼ㆍ롱볼 논쟁이 떠올랐다. 지난 16일 열린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국가채무비율을 (총생산ㆍGDP 대비)40% 선으로 유지하겠다”고 밝히자 문재인 대통령이 “40%의 근거가 무엇인가” 반문하면서 촉발된 논쟁은, 학계는 물론 정치권까지 찬반 논란으로 비화되고 있다. 빈부격차 해소, 사회안전망 강화, 경기활력 제고를 위해서는 과감한 재정투입이 필요하다는 당ㆍ정ㆍ청 입장과 고령화, 통일 등 미래에 재정이 급격히 확대될 때를 대비해야 하는 상황에서 미래 세대에 부담을 지워서는 안 된다는 자유한국당 입장이 팽팽하다.
시간을 잠시 2012년으로 돌려보자. 이명박(MB) 정부 막바지인 그 해 세계 경제는 유럽재정위기라는 악재를 만났다. 겨우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에서 벗어나려던 우리 경제도 타격을 받았다. 특히 내수가 급속히 침체됐다. ‘MB 정부의 스몰볼 정책(소규모 부양책)은 한계에 도달했으니 빚을 내서라도 강력한 경기 부양 조치를 실시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했다. 기획재정부는 추가경정예산 편성을 청와대에 건의했지만 MB 청와대는 이를 거부했다. 결국 2012년 GDP 성장률은 금융위기 직격탄을 맞은 2009년(0.7%)을 제외하고 10년만에 가장 낮은 2.3%에 그쳤다. 심각한 경기 위축시기에 스몰볼만 고집한 셈이다. 그럼에도 MB정부는 ‘글로벌 금융위기의 성공적 극복’과 함께 ‘국가부채비율 안정적 관리’를 경제 치적으로 내세웠다. 한 관료는 “나랏빚은 안 늘었다지만 경제는 고꾸라졌다”고 회고했다.
현재 우리 경제를 보면 당시 상황과 유사하다. 미ㆍ중 무역갈등이라는 대외 악재가 수출을 옥죄고 투자 위축을 불러 고용ㆍ소비까지 부진하다. 이에 문재인 정부는 MB정부와 달리 확장적ㆍ적극적 재정이라는 롱볼 정책을 택했다. 지금 돈을 풀지 않으면 향후엔 더 많은 돈이 투입될 것이 농후하니 당장 정부지출을 늘리는 “선제적 투자”를 하겠다는 얘기다. 실제 많은 경제 전문가들이 돈을 풀어야 할 때라는 데는 동의한다.
문제는 효과다. 문재인 정부는 2018년과 2019년 각각 7.1%와 9.5%씩 정부지출(본예산 기준)을 늘려왔다. 추경까지 포함하면 금액만으로는 75조원 안팎에 이른다. 박근혜 정부 4년 동안 늘린 액수와 비슷하다. 그럼에도 생산, 설비투자, 수출, 고용, 분배지표 등 주요 경제지표는 되레 후퇴했다. 재정을 대폭 늘린 롱볼 정책도 별 소득이 없었다는 얘기다. ‘돈 풀기에만 매달린다’는 비난에 정부는 낭비성 지출 구조조정이라는 우격다짐을 반복하지만, 삭감했던 예산을 되살리는 방식으로 돈을 썼던 전례(본보 2018년 12월 26일자 6면)를 비춰보면 신뢰가 가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주야장천 스몰볼만 고집하는 야구를 보는 것도 답답하지만, 애먼 방향에 고정된 채 헛도는 선풍기처럼 1번부터 9번타자까지 허공에 방망이를 휘두르는 롱볼을 보는 것도 곤욕이다. 이왕 번트로는 점수내지 않겠다고 작정했다면 홈런은 아니더라도 단타라도 쳐야 팬들이 박수를 보내지 않겠는가. 내년 정부지출 500조원 시대를 맞게 되는 국민들의 바람이다.
이대혁 경제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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