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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벨트를 가다]커피와 에코시스템

입력
2019.05.22 09:45
수정
2019.05.22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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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회>환경을 살리는 이르가체페 커피

이르가체페 언덕길을 오르던 차에서 내려 숲 속을 헤치고 들어갔다. 잠시 커피나무를 찾아 두리번거릴 때 붉게 익은 커피 열매들이 눈에 들어왔다. 수확기에 접어든 에티오피아 변종(Heirloom varieties) 커피나무의 줄기에 붉게 익은 열매가 가득하다.

이르가체페 커피는 숲에서 자란다. 커피나무는 엔세테(ensete)라 불리는 열매가 열리지 않는 바나나나무나, 테프(teff, 에티오피아 인들의 주식인 ‘인제라’의 원료), 그리고 낯선 이름의 수 많은 열대의 나무, 풀들과 함께 뒤엉켜 자란다.

어른 키보다 약간 더 큰 높이의 에티오피아 커피나무는 대부분 바나나 등의 그늘 나무(Shade Tree) 아래에서 재배된다. 숲의 그늘이 열대의 햇살로부터 적당히 커피나무를 가려주고, 비바람으로부터 가지가 꺾이지 않도록 지켜준다. 듬성듬성 심어놓은 커피나무 주변에 잡목과 풀들이 우거져있다. 커피 열매가 없었더라면 커피나무는 눈에 잘 띄지도 않을 정도다.

숲과 커피나무가 어우러져 공존하는 시스템. 커피 경작지가 숲이고, 숲 속에서 생태 순환을 이루기 때문에 비료도 농약도 필요 없다. 아울러 일찍이 농민들이 정부로부터 불하 받은 작은 텃밭은 눈에 보이는 밭의 경계도 없다. 숲이 농장이고, 농장이 숲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작물과 덤불조차 구별 못하는 먼 이방인의 눈에 보인 모습이고 실제 커피를 재배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좀 더 세분화된다. 에티오피아에는 야생 상태 그대로 수확하는 산림 커피(Forest, 10%)가 있고, 숲의 밀집도가 조금 낮지만 커피나무를 관리 생산하는 반 산림 커피(Semi-forest, 35%), 일반적인 소농들이 뿌리 또는 향료작물과 함께 재배하는 정원 커피(Garden, 50%) 등으로 구분된다. 이웃나라 케냐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대규모 플랜테이션(Plantation, 5%) 농장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바나나가 열리지 않아 가짜 바나나 나무라고 불리는 엔세테가 따가운 햇살을 적당히 가려주는 사이로 커피나무가 자라고 있다. 엔세테 같은 나무들을 쉐이드 트리(Shade Tree)라고 부른다. 최상기씨 제공
바나나가 열리지 않아 가짜 바나나 나무라고 불리는 엔세테가 따가운 햇살을 적당히 가려주는 사이로 커피나무가 자라고 있다. 엔세테 같은 나무들을 쉐이드 트리(Shade Tree)라고 부른다. 최상기씨 제공

지구의 많은 종들이 멸종 위기의 한복판에 있다. 지난 어떤 시대보다 빠른 속도로 종이 사라지고 있다. 적도를 감싸는 좁은 폭의 열대 우림은 전 세계 동식물 군의 절반을 키우는 요람이다. 그런 열대 우림이 파괴되고 있다는 것은 심각한 환경 재앙 중 하나다. 최근 위성 자료에 따르면 해마다 200만 헥타르(ha) 이상의 열대 우림이 사라진다고 한다. 10초마다 축구장 면적의 숲이 사라지는 셈이다.

열대 우림 속 또는 열대 우림이 있던 자리에 생기는 전 세계 커피재배 면적은 약 1,000만 헥타르로, 고무농장 또는 야자농장 면적과 비슷하다. 다른 농업과 마찬가지로 커피 농장은 삼림 벌채, 생물 다양성 상실, 토양 침식, 기후 변화, 수질과 수자원 활용 문제 등 환경 변화의 원인이 되고 다시 이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대체로 커피 농장이 대규모일수록 더욱 그렇다.

하지만 이르가체페처럼 커피나무와 숲이 함께 있을 경우 추가적으로 필요한 요소는 거의 없다. 나무에서 떨어지는 잎과 동물들의 분변이 분해돼 다시 식물에 흡수되기 때문에 지속 가능한 영양소의 재활용이 가능하다.

따라서 숲의 그늘이 커피나무를 덮어주고 숲과 커피 나무가 공존하는 그늘 재배(Shade Grown) 방식의 재래 농법을 하는 곳은 커피나무만 줄지어 심어놓은 태양 재배(Sun Grown) 방식보다 환경적인 측면에서 훨씬 가치가 높다. 그늘 재배는 커피 경작지 자체가 숲이고, 숲은 다른 추가적인 관리 없이도 생태계 순환을 이루는 지속 가능한(Sustainable) 재배의 핵심 요소다.

빨갛게 익어가는 이르가체페 커피 열매. 숲은 영양소의 재순환을 통해 비료 사용을 줄여 주고 토양의 수분을 보존함으로써 관개가 쉽도록 한다. 또 토양을 잘 결합시켜 침식과 산사태 위험을 줄여 준다. 최상기씨 제공
빨갛게 익어가는 이르가체페 커피 열매. 숲은 영양소의 재순환을 통해 비료 사용을 줄여 주고 토양의 수분을 보존함으로써 관개가 쉽도록 한다. 또 토양을 잘 결합시켜 침식과 산사태 위험을 줄여 준다. 최상기씨 제공

애초에 이르가체페 지역 농부들이 지구 온난화를 염려하거나 유기농법을 통한 고부가 작물을 생산하기 위해 이런 에코시스템을 구축한 것은 아닐 것이다. 대부분의 인류가 커피를 알지도 못했을 수천, 수만 년 전 고대 에티오피아 인들이 숲 속에서 우연히 커피를 발견하고 그 씨를 심어 커피를 재배할 때부터 그들은 이렇게 숲과 어우러진 재배 환경을 이어온 것이리라.

그렇게 숲과 생태계를 지켜온 이 나라 농민들을 위해 자연은 최고의 향미를 자랑하는 커피를 선물했는지 모른다. 수 천 년간 숲을 없애고 개간의 역사를 이어온 인간은 현대에 들어 지구 온난화의 위기를 겪으면서 비로소 자연친화적 재배방식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비록 커피나무의 식수 밀도가 낮아 생산성은 떨어지고 비료와 농약을 살 돈이 없어 부득불 유기농법으로 커피를 재배하지만 숲과 공존하는 커피 생산을 이어온 에티오피아 농부들의 선택은 옳았다. 그래서 이르가체페 커피의 가치가 그 향미만큼이나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는 지도 모르겠다.

최상기 커피프로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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