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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시선, 워코노미]로마를 상대한 에피로스의 ‘값비싼 승리’… 결국 병력 수에 한계

입력
2019.05.18 10:00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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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피로스 전쟁

※ 태평양전쟁에서 경제력이 5배 큰 미국과 대적한 일본의 패전은 당연한 결과로 보입니다. 하지만 미국과 베트남 전쟁처럼 경제력 비교가 의미를 잃는 전쟁도 분명히 있죠. 경제 그 이상을 통섭하며 인류사의 주요 전쟁을 살피려 합니다. 공학, 수학, 경영학을 깊이 공부했고 40년 넘게 전쟁에 대한 관심을 기울여온 권오상 프라이머사제파트너스 공동대표가 <한국일보>에 격주 토요일 연재합니다.

[저작권 한국일보]에피로스 연합군진군 경로/ 강준구 기자/2019-05-16(한국일보)
[저작권 한국일보]에피로스 연합군진군 경로/ 강준구 기자/2019-05-16(한국일보)

수 차례의 삼니움전쟁을 통해 이탈리아반도 중부를 정복한 로마의 다음 목표는 이탈리아반도 남부였다. 그리스인이 지배하던 그 지역의 핵심도시는 타렌툼이었다. 로마가 협정을 위반하며 함대를 타란토만에 진입시키자 타렌툼의 귀족들은 로마와 내통해 자국 민주정부의 전복을 꾀했다. 타렌툼군은 타란토만에 진입한 로마함대를 물리쳤지만 전쟁이 본격적으로 벌어지면 로마군의 수를 견딜 수 없음을 알았다. 타렌툼은 이오니아해 건너 그리스 본토의 에피로스에게 원병을 요청했다. 에피로스의 왕 피로스는 델피의 오라클에게 의견을 구한 후 참전을 결정했다.

◇로마보다 1만명이나 적은 병력

기원전 280년 타렌툼에 상륙한 에피로스연합군은 잡종 부대였다. 에피로스군의 주력은 1만5,000명의 팔랑기테였다. 팔랑기테는 100여 년 전의 그리스 중장보병, 즉 호플리테와 조금 달랐다. 호플리테가 오른손에 2m 이상 길이의 창을 들고 왼팔에 호플론이라는 지름 1m 정도의 목제 방패를 지녔다면 팔랑기테는 6m 이상의 장창을 양손으로 들고 왼쪽 어깨에 작은 방패를 찬 창병이었다. 팔랑기테로 구성된 부대는 마케도니아식 팔랑크스라 불렸다.

에피로스 북쪽에 위치한 마케도니아도 5,000명의 팔랑기테를 보냈다. 에피로스, 마케도니아, 이집트의 세 나라는 혈연으로 맺어진 동맹이었다. 보다 구체적으로 이집트의 파라오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원래 마케도니아인으로서 알렉산더대왕 때의 장군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큰 아들은 마케도니아의 왕, 막내 아들은 이집트의 파라오, 딸은 피로스의 아내였다. 결과적으로 에피로스연합군의 팔랑기테는 전부 2만명이었다.

나머지 병력은 다양한 병종으로 구성되었다. 우선 3,000명으로 구성된 히파스피스트가 있었다. 히파스피스트는 팔랑크스를 구성하지 않고 보다 자유롭게 운용되는 경창병이었다. 그 다음은 기병이었다. 3,000명인 기병의 대부분은 테살리가 보낸 부대였다. 테살리는 마케도니아와 더불어 정예 기병을 가진 걸로 명성이 높았다. 2,000명의 궁병도 포함됐다. 약간 특이한 병력으로 로도스가 보낸 500명의 새총병이 있었다. 타렌툼도 호플리테 6,000명과 기병 1,000명을 동원했다. 마지막으로 이집트가 파견한 20마리의 전투코끼리가 있었다. 피로스와의 전쟁을 통해 로마군은 전투코끼리의 위력을 처음 경험하게 되었다. 즉 피로스가 지휘하는 부대의 총병력은 3만5,500명이었다.

반면 집정관 발레리우스 라에비누스가 지휘하는 로마군 병력은 4개 레기온과 기병 1,200명이었다. 로마의 보병편제인 레기온 1개의 정원은 5,000명이었다. 또한 로마에 복속된 도시국가들이 1만6,800명의 중보병과 2,400명의 경보병, 그리고 4,800명의 기병을 내놓았다. 다 합치면 보병 3만9,200명에 기병 6,000명으로 전체 4만5,200명이었다.

양 군대가 조우한 최초의 전투는 헤라클레아에서 벌어졌다. 병력 수를 비교하면 에피로스연합군은 로마연합군의 80%에도 못 미쳤다. 절대적인 숫자로도 1만명 정도가 모자랐다. 이런 정도의 차이라면 전투의 승패는 거의 확실하게 예상할 수 있었다. 즉 병력이 많은 쪽이 이기는 게 당연했다.

고대 그리스 국가 에피로스의 왕 피로스는 3만5,000명 규모의 병력을 이끌고 전력이 훨씬 앞서는 로마와의 전쟁에서 초반 연전연승 했지만 결국 전과에 비례해 발생하는 자국 군대의 대량 희생을 감당하지 못했다. 에피로스 군이 전투코끼리를 앞세워 로마와 대적하는 장면을 상상해서 묘사한 19세기 말 독일의 상업용 회화.
고대 그리스 국가 에피로스의 왕 피로스는 3만5,000명 규모의 병력을 이끌고 전력이 훨씬 앞서는 로마와의 전쟁에서 초반 연전연승 했지만 결국 전과에 비례해 발생하는 자국 군대의 대량 희생을 감당하지 못했다. 에피로스 군이 전투코끼리를 앞세워 로마와 대적하는 장면을 상상해서 묘사한 19세기 말 독일의 상업용 회화.

◇병사 셋 중 하나 잃고 얻은 승리

헤라클레아전투의 결과는 예상 외였다. 치열한 전투 끝에 대열이 무너진 로마연합군의 패배였다. 로마연합군의 살아남은 병력은 겨우 도망쳤다. 에피로스연합군은 이기긴 했지만 피해가 적지 않았다. 1만1,000명이라는 전사자가 발생했다. 전투에 참가한 병력의 31%에 달하는 손실이었다. 세 명 중 한 명이 죽었다는 참혹한 결과였다.

물론 로마연합군의 손실은 그 이상이었다. 전사자가 에피로스연합군보다 4,000명이 더 많은 1만5,000명에 달했고 약 2,000명이 포로로 잡혔다. 그런데 전사자의 비율로 보면 33%로서 사실상 에피로스연합군과 같은 수준이었다. 포로는 전투에 패배한 후에 발생한 거라 계산에 넣을 대상은 아니었다. 병력이 많은 로마연합군이 비슷한 비율로 피해를 입었다는 자체가 이례적인 일이었다.

전투에 승리하기 위한 한 가지 방법은 상대보다 더 많은 병력을 동원하는 일이었다. 병력이 많은 쪽이 전투에 지는 경우는 예외에 속했다. 병력 차가 아주 크면 상대는 싸울 의지를 잃고 항복하기 십상이었다. 결과가 너무나 뻔해서였다. 이런 경우에는 아예 전투가 벌어지지 않았다. 손자가 최상의 방책으로 제시한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경우였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군인들에게는 한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병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승리했다는 점이었다. 알렉산더대왕이 그랬고, 한니발이 그랬고, 나폴레옹이 그랬다. 나폴레옹은 자신이 치른 거의 모든 전투에서 상대보다 병력이 적었다. 나폴레옹이 최후로 진 워털루전투에서도 프랑스군은 7만3,000명인 반면 영국군은 6만8,000명, 프로이센군은 5만명이었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경력 내내 “신은 다수의 대대 편에 있다”고 외쳤다. 그는 전체 병력은 부족할지언정 특정 공간과 시간에 집중해 수적 우세를 만들어내는 솜씨가 남달랐다. 그런 나폴레옹조차도 워털루전투 때 두 배 가까운 병력 차는 극복하지 못했다.

◇내처 로마로 진격하다

피로스는 헤라클레아전투 이후 로마로 진격했다. 이탈리아 남부의 여러 도시국가가 에피로스 편이 되어 군대를 보냈다. 에피로스연합군은 로마에서 약 60㎞ 떨어진 아냐니에서 집정관 티베리우스 코룬카니우스가 지휘하는 로마군 8개 레기온과 조우했다. 또한 아에밀리우스 바르불라가 지휘하는 4개 레기온과 라에비누스의 잔존 병력이 피로스의 배후를 끊기 위해 이동 중이었다. 수적으로 너무 불리하다고 판단한 피로스는 전투를 회피하고 남쪽의 캄파니아로 후퇴했다.

기원전 279년 피로스는 휘하 부대를 이끌고 서쪽의 아풀리아 공략에 나섰다. 에피로스연합군의 보병은 7만명까지 늘어났다. 하지만 정예라 할 수 있는 에피로스-마케도니아-테살리 병력은 1만6,000명에 지나지 않았다. 전투코끼리는 한 마리가 죽어 19마리가 남았다.

새로 선출된 집정관 데키우스 무스가 이끄는 로마연합군의 병력은 이번에도 에피로스연합군을 능가했다. 8만명의 보병 중 2만명이 로마군 레기온이었고 나머지는 로마의 동맹국 병력이었다. 특히 전투코끼리를 공격하기 위한 300대의 특수수레를 끌고 나왔다.

양측 부대는 아스쿨룸에서 맞붙었다. 치열한 난전이 이틀 동안 계속됐다. 에피로스군은 보급품을 쌓아놓은 본진까지 유린되는 피해를 입었다. 최종적으로 후퇴한 쪽은 로마연합군이었다. 로마연합군은 약 1만5,000명을 잃었다. 즉 피로스는 다시 한번 승리를 거뒀다.

◇”또 이렇게 이겼다간 망한다”

피로스의 승리는 공짜가 아니었다. 에피로스연합군 역시 1만5,000명 정도를 잃었다. 이번에도 전사자의 상당수는 그리스 본토에서 온 정예병력이었다. 적은 병력으로 전투에 이기더라도 이러한 추세가 계속되면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할 방법은 없었다. 피로스는 부하들에게 “이런 식의 승리를 한번 더 하게 되면 우리는 완전히 망하고 만다”고 말했다.

이후 ‘피로스의 승리’는 값비싼 승리를 뜻하는 말로 자리 잡았다. 그건 피로스의 잘못은 아니었다. 피로스는 질 전투를 연달아 두 번이나 이긴 예외적으로 뛰어난 군인이었다. 다시 말해 피로스의 승리는 병력의 우세가 전투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역설적으로 증명하는 사례였다.

피로스는 이후로도 끊임없이 전투를 벌였다. 기원전 278년부터 277년까지는 페니키아인이 지배하던 시칠리아를 정복했다. 기원전 276년에는 튀니지에 위치한 페니키아인의 수도 카르타고 공략을 준비하다 역부족으로 중단했다. 기원전 275년에는 베네벤툼에서 로마군과 마지막 일전을 벌여 패하고는 그리스 본토로 돌아갔다. 기원전 274년에는 아오스강 근방에서 안티고누스 2세의 군대와 전투를 벌여 마케도니아 왕권을 빼앗았다. 기원전 272년에는 스파르타의 내전에 개입했다가 장남을 잃고 후퇴했다. 연이어 개입한 아르고스의 내전에서 결국 숨졌다.

권오상 프라이머사제파트너스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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