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처럼 힘 센 말도 없어요. 내가 나에게서 필요해, 라는 말을 들으면 나는 내 필요의 방향으로 질주하고, 너에게서 필요해라는 말을 듣고 그 필요가 나에게 감염되면 너의 필요를 위해 나는 달려요. 좋은 저녁 한 끼를 위해 “막히는 길 뚫고 차로 몇 시간을 달”릴 수 있고, “다 읽지도 못할 책을 욕심껏 담아 온 내가 더 빛나는 때가 있”어요.
지극히 객관적인 듯 보이지만, ‘필요’처럼 주관적인 시간도 없어요. 엄마가 필요하다가, 아빠가 필요하다가, 방치된 집이 부모보다 더 필요하기도 해요. 아이러니하게도 필요는 불필요가 될 확률이 높아요. 불필요는 필요의 미래 모습이기도 하잖아요.
필요는 동력인 동시에 에너지 소비의 주범이죠. 필요의 동력인 질주의 다른 면은 도망중이죠. 그런데 말이죠. “사랑해, 나도 사랑해요”, 펼쳐진 페이지처럼 확인했음에도 “내 속에 너무 사랑이 없어서 놀라는 때가 있고”, 다정함으로도 나눌 수 없는 “두꺼워지는 침묵”을 시집 한 권처럼 구비하고 있다면, 필요를 멋지게 사용하는 법을 터득한 인물 아닐까요? 필요해서 필요까지 달렸는데, “제때 아닌 도착”을 하는 계속 어긋나는 시간에 대고, “너무 시간이 없어서/너무 바빠서 고치지 않는 마음이 있”다고, “내가 더 무너지게” 된다고 말하는 인물이라면, 오는 공을 멋지게 받아치는 타자 아닐까요?
고쳐지지 않는 마음은 고칠 수 없는 마음이고, 이 어쩌지 못하는 증상을 가지고 있다면, ‘고치지 않겠다’의 자발성을 선택하는 것, 이것이 필요의 충분조건이죠. 공이 날아오면 공을 받아치는 힘, 호락호락하게 받아들이지 않겠다, 그 저항, 그 역행이 나를 나이게 하는 최소 자리, 세상에 다 흡수되지 않는 나, 흔히 ‘정체성’이라고 부르는 것이죠.
이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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