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스타K’로 사제처럼 8년
89년 데뷔한 윤종신ㆍ89년 태어난 장범준의 89년 발표된 노래 리메이크
30년 뛰어 넘는 문화 교류 ‘이제 서른’ 프로젝트
데뷔 30년 윤종신 “세월과 같이 가려고요”
서른 된 장범준 “청춘 넘어 새 이야기로”
가수 윤종신과 장범준은 지난달 서울 이태원의 한 식당을 찾았다. 함께 저녁을 먹으며 그간 못다 한 이야기를 주고받기 위해서였다. 두 사람은 2011년 Mnet 오디션 프로그램 ‘슈퍼스타K3’에서 심사위원과 도전자로 처음 만났다. 어느덧 8년이 흘러 두 사람은 함께 반주로 술잔을 기울이는 선후배가 됐다.
◇연가로 시대를 풍미한 가수들의 만남
“원래 연어 안 먹는데, (그 때 먹은) 연어 샐러드 맛있더라고요. 이젠 전국 순회 공연 다니며 (호텔) 조식 먹을 때 연어샐러드를 다 먹어봐요. 찐 콩 같은 거 있잖아요, 꼭 넣어서.” “(장)범준아, 그거 케이퍼(향신료)야.” 지난달 30일 서울 연희동 연희예술극장. 두 사내가 격의 없이 주고 받은 대화에 ‘풋’하는 웃음이 나왔다. MBC 예능프로그램 ‘라디오 스타’를 보는 기분이었다.
윤종신과 장범준은 최근 노래 ‘그대 떠난 뒤’를 냈다. 록그룹 사랑과평화가 1989년 발표한 동명 노래의 리메이크였다. 윤종신이 프로듀싱을 맡고, 장범준은 노래를 불렀다. 두 사람은 세대를 훌쩍 뛰어넘어 과거와 현재를 음악으로 잇는다. 장범준은 1989년에 태어났고, 윤종신은 같은 해에 데뷔했다. 1989년에 ‘세상에 나온’ 두 가수가 1989년 노래를 30년이 흘러 새롭게 재해석하는 실험이기도 하다. 장범준을 시작으로 태연(‘춘천가는 기차’ㆍ5월 21일)과 어반자카파(‘기분 좋은 날’ㆍ6월)가 작업을 잇는다.
윤종신과 장범준의 협업은 처음이다. 특별한 만남은 ‘이제 서른’ 프로젝트 일환으로 이뤄졌다. 올해 출시 30년을 맞은 삼성물산 패션 부문 캐주얼 브랜드 빈폴이 윤종신과 꾸린, 세대 소통 문화 캠페인이다.
윤종신과 장범준은 연가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윤종신은 ‘오래 전 그날’로 1990년대의 청춘을, 장범준은 ‘여수 밤바다’로 2010년대를 사는 청춘을 울렸다. “종신 형님과는 접점이 많은 거 같아요.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보통의 남자가 평범한 일상을 이야기하는 식의 노래도 그렇고요.” 장범준의 말이다. 두 사람은 대화를 단층처럼 쌓으며 서로 미처 알지 못했던 ‘결’을 발견해 나갔다.
◇“처음엔 범준이 느슨함 어색했지만” “결혼하고 나니 종신 형님 더 보고파”
-서로 오디션에서 처음 봤잖나. 8년이 지나 같이 곡 작업을 하는 기분이 묘할 것 같다.
윤종신(윤)=“ ‘슈퍼스타K’ 때만 해도 우리가 같이 무엇인가를 하게 될지 생각 못했다. 처음엔 범준이의 느슨함이 내겐 어색했다. ‘슈퍼스타K’가 3년째 접어들어 화제를 모으며 출연자들은 비장했고, 심사위원들도 긴장하고 있었으니까. 오디션은 (분위기가) 타이트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었다. 8년 동안 범준이의 성장을 지켜보며 많은 걸 느꼈다. 사람들이 무엇을, 왜 좋아하느냐에 대한 생각이었다. 좋은 목소리와 이야기, 범준이는 또래 가수와 달리 힘을 빼 편안하면서도 노련하게 노래한다. 범준이의 매력을 오디션에선 약간 놓쳤는데, 대중은 그걸 알아봤다. 과장되지 않고 힘들어가지 않은 음악적 태도, 난 범준이 나이 때에 그렇지 못했다.”
-오디션에서 어떻게 긴장하지 않을 수 있었나.
장범준(장)=“(방송 당시 내가 속했던 그룹) 버스커버스커 멤버 중 성격 좋은 브래드가 ‘미국식 사고’를 가르쳐 준 덕이다(웃음). 그때 난 천안에서 올라왔다. 늦은 시간까지 다들 달아올라 음악에 매달렸고, 진정한 삶의 현장을 느꼈다. 내겐 최고의 시간이었다. 힘든 여행일수록 기억에 많이 남으니까. ‘슈퍼스타K’때는 조급함이 없었는데 (데뷔하고 난 뒤) 점점 치열해졌다. 결혼도 하고, 아빠가 되면서 종신 형님을 더 뵙고 싶었다. 누구보다 열심히 그리고 나보다 많은 시간을 버티면서 음악을 해 온 분이지 않나. 종신 형님은 아직도 내게 선생님 같다.”
-장범준이 태어난 해 나온 곡이다. 정서적으로 낯설지 않았나.
장=“원곡을 부른 장기호 선배님이 아버지 보다 두 살 많다. 예전 좋은 노래들은 소위 말하는 클라이맥스가 없더라. 정태춘 선생님의 ‘촛불’을 방송에서 부를 기회가 생겨 연습하는데, 어머니가 과하게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어머니가 정태춘ㆍ박은옥 선생님 팬이다. ‘그대 떠난 뒤’도 음의 굴곡이 크지 않아 목소리로 곡의 완급을 조절하는 데 고민이 컸다. 난 가창력이 뛰어나지 않다. 목소리도 역동적이지 않아 노래를 부를 땐 곡 전체의 분위기를 생각한다. 걸걸하게 툭툭 던지며 불러야 하나 ‘공기 반 소리 반’ 느낌으로 가야 하나 고민하다 종신 형님한테 물었더니 툭툭 던지듯 불러 달라고 하더라.”
-장범준과 정반대로 원곡을 부른 장기호는 목소리가 여리고 부드럽다.
윤=“정서를 질감으로 표현하면 (장)기호형 목소리가 범준이와 비교해 조금 기름지다. 툭툭 던지듯 부르는 스타일은 비슷하다. 범준이가 가성이 의외로 찰지다. 범준이는 어떤 노래든 자기화한다. 특이한 목소리 톤도 이유겠지만 노래의 언어 해석력이 좋다. 외국 곡은 잘 부르는데 우리나라 노래는 잘 못 부르는 친구들이 있다. 그래서 난 오디션 볼 때 커버 곡에 잘 안 속는다. 노래와 언어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가수는 노래로 연기하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 “곡을 내고 1~2년 뒤를 생각한다” “미대 출신인 내게 노래는 그림 같아”
-요즘 음악 소비가 세대별로 너무 나뉘어 있다.
윤=“세대별로 달라지는 게 당연하다. 국민가요란 말을 별로 안 좋아한다. 취향의 다양성 얘기다. 지금 가요계의 문제는 곡의 수명이 짧아진다는 거다.”
장=“난 생각이 좀 다르다. 마흔 살 되기 전에 ‘벚꽃 엔딩’을 생각나지 않게 할 국민 노래를 내고 싶다(웃음). 어쿠스틱에 기반한, 더 많은 사람이 재미있게 부를 수 있는 노래로.”
-장범준은 밴드 버스커버스커 이후 소속사 없이 활동한다. 음악 스타일이 비슷하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힘들지 않았나.
장=“예전엔 몰랐는데 (버스커버스커 이후) 솔로 앨범을 낼 때마다 위기였다. 솔로 1집 반응도 난 괜찮았다고 보는데 주변 관계자들의 기대엔 미치지 못했다. 솔로 앨범에서 좀 더 록적인 시도를 한 건 모험이었다. 지난 3월 낸 솔로 3집도 고비였다. 군대 다녀와서 낸 첫 앨범이었으니까. 밴드 음악을 좋아한다. 솔로 앨범도 그 느낌을 내려 했다. 종신 형님이 그러더라. 다른 사람에 널 맞추려 하지 말고, 네가 좋아하는 거를 남이 좋아하게 만들려 노력하라고.”
-솔로 3집을 내면서 ‘내 지금 얘기를 하고 싶다’고 했다.
장=“미대 출신이라 노래를 그림이라고 생각한다. 내 시각과 고민을 담아 만드니까. 그 과정이 곧 진정성에 닿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새 앨범을 낼 때마다 이야기가 바뀌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다. 하지만 이젠 조금 사라졌다. 솔로 3집에 실린 ‘노래방에서’를 많은 분이 좋아해 주셔서 극복했다고 할까. 동화 같은 내용으로 이야기에 변화를 줬는데 진짜 노래방에서 많이 불러주셔서 감사했다.”
-윤종신은 30대가 위기였다고 했다. 어떻게 극복했나.
(윤종신이 2005년 낸 10집 ‘비하인드 더 스마일’ 표지 사진에서 그는 볼살이 쏙 빠져 있다. 당시 그는 30대였다. 2년 전, 윤종신의 앨범 사진 전시장에서 기자와 만난 그는 “음악적 갈피를 못 잡아 외롭기도 했고, 저 때 내가 (크론병으로)아팠다”고 말했다.)
윤=“2008년 11집 ‘동네 한 바퀴’의 흥행 성적이 안 좋았다. 당분간 앨범을 내지 말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음원 사이트 등 디지털 플랫폼들이 나올 때였다. 난 40대였다. 40대 가수라고 하면 흔히 말해 가요계 중심에서 멀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난 여전히 음악이 좋았고 만들고 싶었다. 많지는 않더라도 분명 내 음악을 좋아해 주는 사람이 있을 텐데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가 폭발적 관심을 얻어 여기서 직접 신곡 홍보도 해보고 매달 노래도 내보자 해서 ‘월간 윤종신’을 시작했다. 운 좋게 (강)승윤이가 내 노래 ‘본능적으로’를 ‘슈퍼스타K’(2010)에서 불러 새삼 화제가 돼 차트에서 1등을 했다. 30곡이 쌓이면서 아카이빙(콘텐츠 축적)의 미학을 깨달았다. 일희일비하지 말자는 마음이 생겼다. 차트는 소위 ‘핫’한 사람들의 얘기고, 난 ‘핫’한 시장에선 벗어나 있다. 꾸준히 가다 보니 노래 ‘좋니’ ‘오르막길’ 같은 음원 차트 역주행 1위 사례도 생겼다. 처음엔 차트에서 밀렸지만, 좋은 곡은 뒤늦게 천천히 사랑 받더라. 곡을 내고, 1년 그리고 2~3년 뒤를 내다본다.”
◇ “갱년기 감성, 곡 엄청 잘 나와” “자연스러움을 기복 없이 보여줬으면”
-방송 출연에 영화 기획까지 벅차지 않나.
(윤종신은 MBC ‘라디오스타’와 JTBC ‘방구석 1열’ ‘슈퍼밴드’ 등에 출연한다. 그는 지난달 넷플릭스에서 공개한 아이유 주연 옴니버스 영화 ‘페르소나’도 기획했다.)
윤=“머리에 떠오른 건 해봐야 직성이 풀린다. 실행하지 않으면 이상한 상상만 낳는다. 성공보다 실패에서 훨씬 많이 배운다고 믿는다. 호기심이 내 에너지의 원동력이다. 궁금한 게 많다. ‘페르소나’도 ‘단편영화는 왜 재미도 없고 돈도 안 될 거라 생각하지?’란 호기심에서 시작했다. 그런데 확실히 난 경영자 스타일은 아닌 것 같다. 대학 연구실에서 이것저것 해보는 연구원이라면 모를까(웃음).”
-’이제 서른’ 프로젝트를 하며 서로 다른 출발선에 서 있다.
윤=“그 시기에 나다운 것을 계속 (창작으로) 던지려 한다. 지금은 51세 윤종신이 하고 싶은, 내년엔 52세 윤종신이 하고 싶은 걸 하는 거다. 나도 30대엔 ‘아, 마흔 되면 무슨 노래야. 은퇴하고 살아야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40대가 되니까 또 할 얘기가 있더라. 쉰 되면 할 얘기 별로 없을 줄 알았는데 또 이야기가 있다. 늙는 게 아니라 세월과 같이 가려 한다. 쉰을 넘기니 갱년기 우울 같은 게 왔다. 그런데 곡 엄청나게 잘 나온다, 요즘. 감성 ‘끝’이다(웃음).”
장=“능숙해지고 싶다. 같은 일을 10년 정도 하면 전문가 된다고 하잖나. 가수 8년 차니 기복을 줄였으면 싶다. 자연스러운 모습을 기복 없이 보여주고 싶은 게 바람이다. 나에 대한 믿음이 적다. 그래서 위축돼 있곤 한다. 서른이 됐고 아빠이기도 하니 모든 일을 여유롭게 대처했으면 싶다. 앞으론 종신 형님처럼 고정적으로 뭔가를 해야 하나 싶기도 하다.”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김의정 인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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