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아녜시(Maria Gaetana Agnesi, 1718.5.16~ 1799.1.9)는 30세이던 18세기 중엽에 미적분학 교과서를 집필한 이탈리아 여성 수학자다. 여성 고등교육이 이례적이던 시대였다. 그의 책은 요란한 찬사를 받으며 여러 유럽어로 번역 출간됐고, 가장 열렬히 박수를 친 이었던 교황 베네딕트 14세는 아녜시에게 볼로냐대 수학교수 임명 교서를 보냈다. 그는 수학뿐 아니라 고대 스콜라 철학에도 밝아 당대 지식인들과 대등하게 당연히 라틴어로 토론했고,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 그리스어 히브리어도 거의 완벽하게 구사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밀라노의 사업가 겸 독서가 피에트로 아녜시의 21남매 중 장녀로 태어났다. 실크 사업으로 큰돈을 번 집안이어서 아버지는 귀족과 맞먹는 대우를 받던 부르주아지였다. 마리아는 훌륭한 가정교사들로부터 교육받았고, 언어와 철학, 당대의 학문이라 할 뉴턴 역학 등 자연과학에 특히 매료됐다고 한다. 아버지는 다양한 분야의 지식인들을 집에 초대, 토론을 벌이는 자리면 어김없이 마리아를 불러 딸을 자랑삼곤 했다.
미국의 수학자 겸 과학사학자 클리포드 트루스델(Clifford Trusdell, 1919~2000)에 따르면 널리 알려진 아녜시에 대한 이야기 중에는 과장되거나 왜곡된 면이 있는 듯하다. 아버지가 볼로냐대 수학 교수였다는 것도 잘못 알려진 사실이고, 아녜시가 그 대학에 취임한 적도 없었다.
1748년 그가 ‘이탈리아 청년들을 위한 미분적분학’을 발간하자 교황은 극찬의 편지를 썼고 1750년 10월에 교수 임명 조서를 보냈다. 마리아는 수락ᆞ거부 의사조차 밝히지 않았지만 뜻과 무관하게 이후 45년간 서류상의 교수로 남았다. 그가 9세 무렵에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한 장문의 라틴어 담화문을 작성했다는 설도 있지만, 트루스델에 따르면 그 글은 그의 가정교사 중 한 명이 이탈리아어로 작성한 것을 마리아가 라틴어로 옮긴 것이다.
그는 아버지와 달리 지식의 과시에 염증을 느꼈다. 아버지의 반대로 수녀의 꿈을 포기하는 대신, 원할 때 언제든 교회에 가고, 늘 소박한 옷을 입고, 연회나 극장 등 세속적 쾌락의 자리에 참석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고 한다. 책 출간 이후의 그는 사실상 은둔하며 가난하고 병든 여인들을 돌보았고, 틈틈이 독서하며 여생을 보내다 빈자들의 공동묘지에 묻혔다. 최윤필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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