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미적 취향을 과시하려는 사람들이 멀쩡한 작품을 비난하는 것만큼 흔한 일도 없다. 약간의 예외를 제외하면, 그들은 훌륭한 예술로 인정받는 작품을 모욕하는 위험은 피하면서, 동시에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작품을 비난하는 진부함도 멀리하려 한다. 그리하여 고상한 체하는 사람들의 손쉬운 불평은 눈에 잘 띄는 공공조형물에 쏠리곤 한다. 이를테면 지난달 판문점선언 1주년 기념식장에 설치된 ‘인사하는 사람’ 조형물이 그랬다. 뉴스 댓글마다 “이런 것이 왜 여기에”라든가 “그냥 북한으로 가라”는 식의 흔해 빠진 불평들이 있었다.
그러나 국내 공공조형물들은 이미 빼어난 성취를 보이고 있다. 일부 자국민의 불만 대상인 조형물이 외국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경우가 많다. 최근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김지현 작가의 ‘총알맨’이 그런 경우다. 동그란 뚜껑을 뒤집어쓴 남자의 나신으로, 과장된 복근 아래 덜렁 내놓은 것이 모습을 드러내고, 뒷면에는 엉덩이를 힘껏 수축한 금속 조형이다. 외국의 온라인 게시판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이 작품은 ‘인터넷 밈’에서 나아가 인기만화의 패러디 소재로 등장했으며, 급기야는 이 작품을 보기 위해 한국을 찾는 사람이 나올 정도다.
평창 비엔날레에 출품됐던 ‘총알맨’은 공공조형물로 남아 있었는데, 동계올림픽 동안 평창을 방문한 외국인들의 눈에 이 작품은 퍽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올림픽과 관계 없어 보이는 생뚱맞음이 오히려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 냈다. 이렇게 주변 환경이나 맥락에서 벗어난듯한 표현에서 한국 공공미술의 진취적 면모를 발견하는 사람들이 있다. 히라이 토시하루 한양여대 조교수는 7년 전 일본어로 낸 그의 책에서 한국의 공공조형물에 관하여, 아름다운 공간에 일부러 엉뚱한 것을 넣는 장난기가 한국의 기묘한 맛이라고 평한 바 있다.
한국문화 전문 칼럼을 쓰는 요시무라 타케시는 그런 장난기가 넘치는 작품으로 유영호 작가의 ‘인사하는 사람’, 김지현 작가의 ‘총알맨’, 정진아 작가의 ‘분예기’(대학로에 놓인 똥 모양 조형물) 등과 함께 여러 지역의 특산물 조형을 언급했다. 그에게 한국 공공조형물은 한국인 특유의 기발함과 비즈니스 이메일에도 이모티콘을 넣을 수 있는 관대함이 드러나는 표상이다. 하지만 한국인 친구들에게 공공조형물에 대해 물어보면 “잘 모르겠다”는 대답을 듣는다고 한다. 평창의 ‘총알맨’이 외국에 ‘모루겟소요(Morugessoyo/モルゲッソヨ)’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사정도 바로 그런 대답 때문이다.
외국 평자들이 한국의 재치와 미적 특수성을 발견하는 작품들을 우리는 잘 모르고 지나친다. 일부 고상한 사람들은 “이런 것을 왜 여기에”라며 볼멘소리를 내놓기도 한다. 그러나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전 지구적 히트를 친 까닭도 사실은 그 뮤직비디오에 나오는 모습에서 비롯된, “이런 짓을 왜 여기에서”라는 감각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이미 어디에서도 보지 못할 유별난 풍경을 가지고 있다. 이런 풍경이 싫은 사람이 있는 것도 당연하겠지만, 한국이 가진 특이한 멋스러움을 오직 한국인만이 알아보지 못하는 현상은 이상하다.
최근 몇 년 사이 지자체들이 조례를 통해 공공조형물을 규제, 감독하려는 움직임이 늘고 있다. 향토 특산품 조형물들을 우스꽝스런 흉물 정도로 생각하는 일부 식자층의 영향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조형물이 웃음을 자아내는 것이 어떻단 말인가. 노르웨이는 새 화폐에 인물을 지우고 선박이나 등대를 그려 넣었지만 우리는 공공조형에서 그들보다 먼저 영웅 없는 시대를 열었다. 내가 좋아했던 조형물은 어느 지역행사에 나온 거대한 인삼모형이었다. 인삼의 다리 사이로 작대기 하나가 까딱까딱 움직이는 그 작품은 논란 끝에 철거돼야 했다. 아아, 고유의 멋을 펼치지 못하는 도덕국가라니, ‘이런 것이 왜 여기에!’
손이상 문화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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