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문을 열기 위해 문고리를 잡다가 손가락 끝에서 따끔함을 느낀 경험이 누구든 있을 것이다. 이 기분 나쁜 찌릿함의 주인공이 정전기다. ‘고요하다’, ‘정지하다’란 뜻을 지닌 한자 ‘정(靜)’이 붙어 있는 이름처럼 정전기는 흐르지 않고 머물러 있는 전기란 뜻이다. 종종 예상치 못한 불쾌감을 주곤 하지만, 한편에선 우리 생활을 매우 편하고 건강하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일상생활에서 널리 쓰이는 복사기는 물론, 이제는 필수 가전제품으로 자리 잡은 공기청정기와 미세먼지 마스크도 모두 정전기를 이용한다.
◇양전하ㆍ음전하 이용해 복사
물질을 이루는 원자는 양(+)전하를 띠는 원자핵과 음(-)전하인 전자로 구성된다. 보통은 양전하와 음전하 수가 같아 전기적으로 중성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서로 다른 두 물체가 접촉하면 한 물체에서 다른 물체로 전자가 옮겨간다. 이때 전자를 얻은 물체는 전자 수가 많아졌으니 음전하를, 전자를 잃은 물체는 전자가 줄어들었으니 양전하를 나타낸다. 이재복 한국전기연구원 전기환경연구센터장은 “이렇게 마찰에 의해 생긴 다음 어딘가로 또 다시 연속해서 흐르지 않는 전기가 바로 정전기”라며 “물건을 만질 때 따끔거림을 느끼는 건 어느 정도 몸 안에 쌓인 정전기가 순간적으로 짧은 거리를 이동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미국 소재 전자회사에 다니던 체스터 칼슨은 정전기의 원리를 이용, 1936년 복사기를 발명했다. 흰 종이 위에 정전기로 검은색 토너(흑연 가루)를 묻혀 복사본을 만드는 식이다. 원본 서류와 똑같은 사본을 만드는 일을 하던 칼슨에게 정전기는 업무를 보다 편하게 만든 열쇠가 된 셈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복사기 안에는 원통 모양의 드럼이 설치돼 있는데, 이 드럼은 양전하로 대전돼 있다. 대전은 특정 물체가 전하를 띠고 있다는 뜻이다. 드럼 표면에는 주기율표상의 원자번호 34번인 셀레늄이 덮여 있다. 셀레늄은 평시에는 양전하를 띠지만 빛을 받으면 음전하로 바뀐다. 복사가 시작되면 복사기 유리판 위에 놓인 문서를 복사기 내부에서 나오는 밝은 빛이 훑고 지나가고, 이런 과정을 통해 드럼 위에 상(想)이 맺히게 된다.
문서에서 그림이나 글자가 쓰여 있지 않은 흰 색의 빈 공간은 빛을 그대로 반사시키기 때문에 드럼 위에 맺힌 문서의 상에서 여백 부분은 음전하를 띤다. 빛이 반사되면서 셀레늄의 전기적 성질이 양전하에서 음전하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반면 글씨나 그림이 있는 검은 부분은 빛을 흡수한다. 그래서 빛이 드럼 쪽으로 반사되지 않아 드럼 위에 맺힌 문서의 글자ㆍ그림 부분은 여전히 양전하를 갖고 있게 된다.
이 센터장은 “성격이 다른 정전기의 전하는 서로를 잡아당기기 때문에 이후 음전하를 띤 토너가 양전하 성질을 갖고 있는 드럼의 글자ㆍ그림 부분에 달라붙게 된다”며 “마치 특정 부위에만 페인트를 칠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설명했다. 그런 다음 드럼 아래로 새로운 종이를 통과시키면서 종이 아랫부분에 보다 강력한 양전하를 대전시키면 드럼에 있던 토너가 종이로 옮겨 붙으면서 원본과 똑같은 사본이 만들어진다.
◇형광펜 부분이 복사되지 않는 이유
복사돼 나온 종이를 곧바로 만져보면 따끈따끈하다. 이는 복사본이 될 종이가 기계 안에서 뜨거운 롤러 사이를 통과하기 때문이다. 정전기의 힘만으론 토너를 종이 위에 안정적으로 고정시키기 쉽지 않다. 정전기가 사라지면 토너 역시 종이에서 떨어진다. 사본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못하는 것이다. 때문에 토너가 붙어 있는 종이를 표면 온도가 180도가 넘는 롤러 사이로 통과시켜 토너를 종이에 눌어붙도록 하는 것이다. 롤러가 정전기의 힘을 보완해주는 셈이다.
문서를 복사하다 보면 형광펜으로 칠한 부분은 복사본에 나타나지 않는 걸 볼 수 있다. 이는 빛 반사와 관련 있다. 형광펜에는 투명한 형광 물질이 들어 있다. 글자가 적혀 있는 문서의 검은 부분은 빛을 흡수하고 여백은 빛을 반사하기 때문에 복사기는 이를 명확히 구분할 수 있다. 하지만 형광 물질은 이미 빛을 발산하고 있기 때문에 복사기는 형광펜이 칠해진 부분과 빛을 반사하는 종이의 여백을 같은 것으로 인식한다. 그래서 글자 일부를 형광펜으로 칠했어도 글자만 복사되는 것이다.
◇미세먼지도 정전기로 제거
정전기는 공기청정기나 미세먼지 마스크에도 사용된다. 공기청정기 중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게 필터식이지만, 더러 이온식 공기청정기도 있다. 이온식 공기청정기는 먼저 음의 성격을 갖는 이온(전하를 띤 입자)을 공기 중에 흩뿌려 먼지들이 전기적으로 음의 성질을 갖게 한다. 그런 다음 양의 성질로 대전시킨 공기청정기 집진판에 달라붙게 해 먼지를 수집한다.
미세먼지 마스크 역시 서로 다른 성격의 전하가 서로를 밀거나 잡아당기는 힘을 이용해 먼지를 흡착한다. 미세먼지 마스크 안에는 초고압 전류로 처리된 정전 필터가 들어 있는데, 여기엔 양전하와 음전하가 골고루 분포돼 있다. 미세먼지를 이루는 성분인 질산염과 암모늄, 황산염 등은 모두 극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착용자가 호흡할 때 코나 입까지 들어오지 못하고 마스크의 정전 필터에 달라붙는다.
정전기는 다양한 일상생활 제품에 꽤 유용하게 쓰이지만 위험을 초래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건조한 날씨에 주유할 때 옷에서 발생한 정전기 불꽃이 주유구 쪽으로 튀면 화재를 불러올 위험이 있다. 이 센터장은 “주유 전에 정전기 방지 패드에 반드시 손을 대서 먼저 정전기를 흘려 보내야 화재를 방지할 수 있다”고 말했다.
변태섭기자 liberta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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