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등단 20년차가 된 편혜영 작가는 부쩍 ‘나이듦’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명지대 문창과에서 소설을 가르치고 있기도 한 그는 “오히려 젊은 작가들이 에너지도 많고 문학에 대한 냉소가 없어서, 그들로부터 힘을 얻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문학과지성사 제공

그의 소설을 읽을 때면 한기가 든다. 한번 찾아 든 오한은 쉽사리 가시지 않아서, 책을 덮은 후에도 오랫동안 몸으로 이야기를 앓게 된다. 2000년 등단해 ‘한국형 서스펜스’라는 세계를 이룩해 낸 편혜영 작가가 6년만에 단편집 ‘소년이로’를 냈다. 숨을 바싹 몰아 쉬게 하는 긴장으로 팽팽하면서도, 답을 영영 낼 수 없는 문제를 받아 든 것처럼 아득하게 만드는 소설 8편이 실렸다.

표제작인 ‘소년이로’의 제목은 주자(朱子)의 소년이로학난성(少年易老學難成ㆍ소년은 늙기 쉬우나, 학문은 이루기 어렵다)에서 따왔다. 소년이 유년기와 작별하는 이야기를 편 작가 특유의 미스터리한 이미지들로 그려낸다. 최근 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편 작가는 “성장이라는 게 꼭 순차적인 것만은 아니고 상실을 통해 비약적으로 이뤄지기도 한다”며 “죽음을 목격함으로써 삶의 유동성을 깨닫는 소년을 그려내고 싶었다”고 말했다.

8편의 소설은 갑자기 다치거나, 파산하거나, 죽거나, 예상하지 못한 사건사고를 맞닥뜨린 사람들의 이야기다. 아파트에서 떨어진 이불을 피하려다 허리를 다치거나(‘원더박스’), 용량대로 제초제를 사용했는데도 마당이 엉망이 돼버리거나(‘잔디’), 평화로운 가정이 외할아버지의 치매로 무너진다(‘다음 손님’).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몰락과 균열은 일찌감치 시작되고 있었다. 눈치채지 못했을 뿐. 편 작가는 “몰락의 서사는 ‘도대체 내게 왜 이런 일이 벌어졌지’라고 질문하며 자신을 직면하는 계기를 만든다”며 “조금만 더 예민했더라면 미리 알아차릴 수 있었을 텐데 그렇지 못해서 실패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끌린다”고 말했다.

편혜영(왼쪽) 작가의 신작 '소년이로'에는 "또다시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인생에 속아 넘어갔다"고 말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소년이로
편혜영 지음
문학과지성사 발행ㆍ256쪽ㆍ1만 3,000원

관조하듯 몰락을 무기력하게 받아들이는 소설 속 인물들의 모습은 편 작가의 삶에 대한 태도와 맞닿아 있다. “인생을 받아들일 때 불확실한 어떤 것을 마주하고 있다는 느낌을 자주 받아요. 상황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해석할 수 있다면 해결하려 하겠지만, 불안해하면서 막연하게 느끼기만 할 뿐이에요. 저의 소설이 명확한 ‘인과’가 아닌 ‘분위기’나 ‘기미’로 가득한 것도 그래서죠.”

수록작 ‘식물애호’는 편 작가의 장편소설 ‘홀’(2016)의 모티프가 된 단편이다. ‘홀’은 지난해 고딕 호러 소설의 선구자인 미국 작가 셜리 잭슨의 이름을 딴 동명의 문학상을 받았다. 한국 장편으로는 최초였다. 편 작가는 해외에서 널리 알려진 이름이다. 그는 “서스펜스는 지역적 특성이나 배경지식 없이도 독자에게 가 닿기 때문에 해외에서도 즐겁게 읽어주시는 게 아닌가 싶다”고 멋쩍어했다. 이어 한국 여성작가들의 작품이 해외에서 잇달아 좋은 반응을 얻는 것에 대해 “소설 자체가 갖고 있는 힘이겠지만, 남성적 시선, 말하자면 한국 특유의 가부장적 시선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올해로 등단 20년차인 편 작가는 요즘 ‘나이듦’에 대해 부쩍 자주 생각한다. 직전 소설집 ‘밤이 지나간다’(2013)에서 이번 ‘소년이로’까지, 노인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다. “혼자 남아 독선적으로 나이 들어가는 노인의 이야기를 많이 썼어요. 남에게 폐 끼치지 않고 자존감을 지키는 어른이 되자고 생각하거든요. 나이 들면서 한 가지 다행인 게 있어요. 예전에는 쓰고 싶은 이야기를 많이 비축해 놓고도 다음 소설을 못 쓰게 될까 봐 두려웠는데, 지금은 갖고 있는 이야기가 없어도 어떻게든 소설을 써낼 수 있다는 배짱이 생겼다고 할까요. 앞으로 쓸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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