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토종벼 전도사 우보농장 이근이 대표
※“10~20년 후 농민이 스포츠카 타는 시대가 올 것이다.” 세계적인 투자가 짐 로저스가 한국을 방문해 한 말입니다. 정말 가능한 일일까요? <한국일보> ‘농사짓는 기자’가 한 달에 한 번 대한민국의 촉망받는 농업 CEO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트럼프는 모르고 먹었을 거예요. 사실 그 안에는 ‘통일’이 담겼는데 말이죠.”
북한과 미국이 연일 전쟁을 운운하던 2017년 가을. 전통벼를 예술작품으로 만들어보고 싶었던 이근이(52) 우보농장 대표는 예술가 몇몇과 함께 토종벼를 주제로 청와대 인근 통의동 보안여관에서 작품 전시회를 열었다. 필연이었을까. 보안여관 대표의 어머니는 마침 방한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만찬 준비를 담당하게 됐다. 보안여관 대표는 전시회를 본 뒤 이 대표에게 “토종벼를 트럼프 대통령 만찬에 올리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해 왔다. 그렇게 비밀스럽게 준비된 토종벼는 ‘남북이 하나 된다’는 의미를 담아 한미 정상회담 만찬 돌솥밥으로 올랐다. 이 대표가 직접 재배하고 선택한 북한의 토종벼 북흑조ㆍ흑갱, 남한의 자광도ㆍ충북흑미 등 4종이었다.
이 대표는 농사만 짓는 농부는 아니다. 농촌활동가다. 자신이 재배하는 작물에 자신만의 철학을 담아내고 이를 사람들에게 전파한다. 토종벼를 알리기 위해 씨앗을 무료로 나눠주는가 하면, 매년 고추, 고구마, 감자 등의 작물을 함께 재배하는 공동체를 만들어 도시민들에게 농사의 경험을 나누고 있다.
또 농부라면 모두가 관심을 갖는 각종 정부정책자금을 거부한다. 유기농보다 더 힘든 전통농법으로 농사를 지으면서도 유기농 인증은 신청하지 않는다. 정부의 유기농 인증이 자연보다 사람 중심의 농법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특히 이 대표는 농산물 생산보다 농사로 인해 땅이 다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다. 이 때문에 화학비료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물론, 기계 사용도 최대한 줄였다. 미생물이 땅속에서 다치지 않고 살 수 있는 환경을 위해 노력하는 차원이다. 번거롭지만 재래식 화장실인 ‘생태뒷간’을 만들어 대·소변을 받고, 이를 재로 덮어 비료를 만든다. 몸이 고되다 해도 제초제 대신 손으로 잡초를 뽑아내는 것도 이 대표에겐 당연한 원칙이다.
심지어 하우스나 밭작물 재배에 사용하는 비닐도 환경 오염을 이유로 사용하지 않는다. 농사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농작물의 씨앗조차 구입하지 않고 직접 심은 작물에서 채취해 보관했다 농사에 이용한다.
이 대표는 18년 전까지만 해도 농사에 관심도, 경험도 없던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젊은 시절에는 대중문화 비평지 ‘리뷰’의 편집장을 지냈고, 2000년 라이코스코리아의 투자를 받아 운영된 웹진 ‘컬티즌’의 대표를 맡기도 했다. 그러던 그가 지금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토종벼 볍씨를 가진 농부, ‘토종벼 전도사’로 재탄생했다.
시작은 2000년이었다. 아내가 가꾸는 경기 과천시 인근 5평짜리 텃밭에서 자라나는 작물을 보며 호기심이 발동했다. 이렇게 시작한 이 대표의 농사는 이제 7,500평 규모의 밭과 논으로 늘어났다. 이 대표도 진짜 농부가 됐다.
자신의 명함에는 얼굴 대신 토종벼인 북흑조를 그려 넣은 농부. 평생 손에 흙 한 번 묻혀보지 않던 그가 어떻게 농사를 시작하게 됐는지 들어봤다.
-한미 정상회담 만찬에 ‘통일 쌀밥’을 올렸다.
“젊었을 적 문화계에서 일을 했기 때문에 음반과 책에 관심이 많았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음악 등으로 표현해 보면 좋겠다 싶어 보안여관에서 작가, 설치미술가, 음악인들과 함께 토종벼를 주제로 전시회를 열었다. 그때 마침 보안여관 대표가 한미 정상회담 만찬에 토종벼를 올려보자고 제안 해왔다. 그래서 남과 북의 쌀을 더해 남북이 하나되는 그런 의미를 담자고 역제안을 했다. 그 때 올라간 쌀이 북한의 북흑조, 흑갱, 남한은 자광도, 충북흑미 등 총 4종이다. 그 속에 그런 의미를 담아 냈다는 걸 당시에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도 그런 의미를 모르고 밥을 먹었을 거다.”
-농사는 언제부터 시작했나.
“살면서 흙 한 번 만져보지 않고 자랐다. 당연히 농사를 전혀 몰랐고 관심도 없었다. 2000년 과천에서 살 때 아내가 근처 주말농장 5평을 임대 받아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그때 처음 농사를 경험한 것이 전부다. 그러다 2004년 일산으로 이사를 하면서 직접 주말농장 5평 밭을 분양 받아 농사를 시작했다.
2007년에는 기독교계 수도원인 동광원에서 만난 4명의 사람들과 모여 200평 땅에서 함께 농사를 지었다. 이때 주말농장을 운영하던 곳이 동광원이었는데, 이곳에서 할머니들의 농사법을 배우고, 사람들을 만나 작물공동체를 이뤄나갔다. 소문이 났는지 비어있는 자신의 농지에서 농사를 지어달라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4명이 하기에는 벅차 각 작물 별로 사람들을 모아 공동체를 조직했다.
마늘, 감자, 고구마, 고추 등의 공동체가 있고, 해당 작물을 재배할 때까지만 모여서 농사를 지었다. 그러다 보니 2007년 200평에서 몇 년 만에 1,500평이 됐고, 2014년에는 1만3,000평까지 땅이 늘어났다. 여러 농장이 함께 모여 농사를 짓다가 지금은 따로 나왔다. 논 4,000평, 밭 3,500평을 더해 모두 7,500평 규모로 경기 고양시에서 우보농장을 운영하고 있다.”
-동광원은 어떤 곳인가.
“동광원은 6·25전쟁 때 전쟁고아들을 돌봐주던 여성 수도자들이 머무는 곳이다. 이곳에서 할머니들이 음식물 찌꺼기로 거름을 만들고, 씨앗도 지난해 작물에서 받아뒀다가 농사를 짓는다. 이때 처음 순환농법을 알았다. 이 순환농법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먼저 씨앗의 순환이다. 지금처럼 종자회사에서 개량한 씨앗을 사다 쓰는 것이 아니라 내 손으로 씨를 받아 농사를 짓는 방식이다. 또 하나는 거름의 순환이다. 사람의 몸에서 나오는 대·소변을 밭이나 논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을 봤다. 그래서 우보농장에는 생태뒷간을 뒀고, 소변과 대변을 따로 받아 발효 시켜 비료로 사용하고 있다. 물론 농사짓는 땅이 넓어 그 양만으로는 비료가 부족해 유기균배양체 비료도 함께 사용한다.”
-농작물은 모두 유기농 인증을 받았나.
“유기농 인증제도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저도 초기에는 무농약 인증까지 받았지만, 그 이후 문제가 많다고 생각해 더 이상의 인증은 받지 않는다. 지금 유기농법은 토양을 어떻게 살리느냐, 미생물을 어떻게 살리느냐를 전혀 고민하지 않는다. 땅속 미생물이 살아 있는지, 자연방식으로 작물을 키우는지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다. 농약이나 화학비료를 주지 않았을 뿐 이것이 진정한 유기농인가는 고민해봐야 한다.”
-토종벼만 고집하는 이유가 있나.
“토종벼는 그 자체로 가치를 가졌다. 물론 가치라는 것이 ‘나중에 이 작물이 뜰 것이다’ 이런 차원의 가치가 아니다. 토종벼를 심은 것도 처음에는 궁금증에서 시작했을 뿐이다. 과거에 선조들은 어떤 벼를 심었겠느냐는 궁금증이 이어져 새로운 볍씨들을 계속 심어나갔다. 지금은 그 수가 150여종까지 늘어났다. 아마 매년 같은 볍씨를 심었다면 저도 토종벼를 고집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계속 새로운 볍씨를 찾고 심다 보니 흥미가 이어져 지금까지 왔다. 토종벼는 맛, 모양, 키, 재배지역이 모두 다르고 이름에는 역사성까지 담겨 있다. 이런 전통과 역사가 담긴 토종벼인데 당연히 높은 가치를 가졌다고 봐야 한다.”
-토종벼가 얼마나 다양한가.
“국내에는 총 450종의 토종 볍씨가 있다. 앞으로 300종 정도의 볍씨를 더 심을 수 있다. 물론 지금 제가 가진 것이 150여종이고, 나머지는 국립농업유전자원센터에 요청해 볍씨를 받을 생각이다. 문헌을 찾아보면 1910년도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1,450종의 토종벼가 있었다. 토종벼가 사라진 것은 생산성을 높인다며 1970년대 개량벼를 보급하면서다. 그전에는 붉은들녘, 검은들녘이 있었는데 개량벼를 심으면서는 모두 황금들녘만 보게 됐다. 지금은 토종벼를 전국 농부들에게 무상으로 나눠주고 각 지역에서도 뜻이 있는 농부들이 조금씩 토종벼를 재배하고 있다.”
-앞으로의 계획은?
“쌀가게를 해볼까 했었다. 그런데 농사 때문에 전혀 시간이 나지 않아 포기한 상태다. 대신 지금은 주점을 생각하고 있다. 토종벼와 막걸리를 결합하면 가능성이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토종벼를 확산하거나 쌀의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는 것이 막걸리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시중에 파는 중국산 쌀로 만든 막걸리가 아닌 옛날 주점에서 팔던 막걸리들을 재연해 볼 생각이다. 옛날에는 주점이 13만개였다는데 막걸리를 빚는 문화나 쌀 품종마다 막걸리 맛이 다 달랐다. 재배한 쌀들로 이미 막걸리를 만들어봤고 시음도 해봤다. 작년에는 16종의 토종벼를 갖고 일반인을 대상으로 시음회를 가졌는데 반응이 꽤나 좋게 나왔다.”
이 대표는 자신이 고집하는 순환농법만이 최고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은 소농이기에 이 같은 방법이 가능할 뿐, 비닐하우스를 이용하거나 기계로 농사를 짓는 농부들 역시 농촌을 함께 지켜가는 동반자이자 친구들이라고 말한다. 토종벼 씨앗을 무료로 나누고, 도시민들을 초대해 농촌을 경험하게 하는 일이 최고의 가치라는 이 대표에게서 진짜 농부의 향내가 묻어났다.
김태헌 기자 119@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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