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성범죄자 잡는 형사로 데뷔 14년 만에 첫 주연
“왜 성범죄 피해자가 숨냐는 대사하며 부아 치밀었다”
라미란은 2005년 ‘친절한 금자씨’로 스크린 데뷔를 했다. 주인공 금자(이영애)가 감방에서 만난 친구 역할로 짧게 등장했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지금은 유명 배우가 됐다고 하나 연기 활동 대부분의 시간을 무명으로 지냈다. 라미란이 배역 이름을 가지게 된 때는 데뷔 5년이 지난 후였다.
감초 배우로 여겨지던 라미란이 처음으로 주인공이 됐다. 데뷔 14년 만이다. 그가 스크린 중심에 서는 영화는 ‘걸캅스’(9일 개봉). 배역은 여자형사기동대 출신 경찰 박미영이다. 한때 화려한 검거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음에도, 결혼과 출산으로 현재는 경찰서 민원실 한 켠에 자리 잡은 인물이다. 박미영은 우연히 접한 디지털 성범죄를 젊은 여형사 조지혜(이성경)와 함께 추적하며 민완 형사 기질을 다시 발휘한다. 최근 서울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난 라미란은 “몇 년 전부터 주연 대본이 들어왔지만,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고 부담이 돼 거절했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조연 연기처럼 매 촬영마다 최선을 다했더니, 나중에는 지칠 정도로 너무 힘들었다”고도 했다.
마흔 중반에 맡게 된 첫 주연. 조금은 서운할 수 있다. 하지만 라미란은 담담했다. 그는 “가늘고 길게 가는 것이 꿈”인 사람이라서다. “네 첫 주연은 내가 꼭 할 것이니 기다려라”던 영화 제작자의 호언이 아니었다면, 그의 주연 데뷔는 더 늦어졌을지 모른다.
공교롭게도 ‘걸캅스’는 ‘버닝썬 게이트’로 사회가 들썩이는 시기에 개봉한다. 지난해 여름 촬영을 끝마쳤을 때만 해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다. 라미란은 캐스팅 전 불법촬영 및 유포 범죄에 대해서도 무지했다. 그는 “예전에는 클럽 안 가고, 부킹 안 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생각했는데, 연기를 하면서 누구나 이 범죄에 노출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영화에는 ‘왜 피해자들이 숨고 말 못하는가’라는 대사가 있는데, 부아가 치밀고 공감이 갔다”고 덧붙였다. “(연예인 불법촬영 사건이 불거지기) 이전에도 드러나지 않았을 뿐 만연했었던 일이었잖아요. 사람들은 ‘걸캅스’가 앞일을 내다봤다고 말하는데, 개봉 시기가 우연히 들어맞았을 뿐인 것이지요.”
개봉을 하지도 안 했는데 네티즌 사이에선 설전이 벌어지고 있다. 여성 경찰의 활동을 무턱대고 미화하는 것 아니냐는 주장과 이에 맞서는 목소리가 부딪히고 있다. 여성혐오가 영화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를 막고 있는 셈이다. 라미란은 “리뷰를 공격적으로 올리는 것은 환영하니, 일단 영화를 보고 말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남성 버디 영화와 달리, ‘걸캅스’는 (등장인물의 사연을) 좀 더 자세하게 공감하는 영화”라며 “페미니즘 영화로 의도하고 촬영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부분에 의미를 두면 충분히 그렇게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헌신적인 상궁(영화 ‘덕혜옹주’), 돈에 따라 움직이는 재벌가 여인(‘상류사회’) 등 다종다양한 연기를 해온 그는 여전히 다른 결의 연기를 선보인다. ‘걸캅스’로 생애 첫 액션 연기에 도전했다. 라미란은 “액션에 소질은 있는데, 신체는 준비가 안 된 것 같다”고 웃으며 말했다. ‘걸캅스’를 찍으며 새 연기 욕심도 생겼다. “작은 사건이지만 우리 일상에 큰 영향을 주는 사건을 다룬 영화를 찍어보고 싶다”는 것이다. 최근엔 MBC 예능 프로그램 ‘전지적 참견 시점’에 출연해 홍게 간장 요리를 선보이며 남다른 예능감도 발휘했다. 라미란은 “예능은 오롯이 자신을 보여주게 돼 부담스럽고 힘들지만, 다른 사람과 조합이 좋아서 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라미란은 어느새 후배 배우들의 롤모델이 됐다. ‘걸캅스’에서 호흡을 맞춘 동료 배우 염혜란은 공공연하게 제2의 라미란을 꿈꾸고 있다고 말할 정도다. 하지만 그는 “나 스스로가 (지나치게) 높게 평가됐다”고 겸손하게 말했다. 오랜 무명시절을 견디며 자신의 길을 개척한 그에게도 따르고 배우고 싶은 선배가 있다. 최근 JTBC 드라마 ‘눈이 부시게’를 보면서 김혜자를 롤모델로 정했다고 했다. “김혜자 선생님처럼 여러 좋은 작품을 다 잘 해내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인생의 끝이 나쁘지 않게 길을 잘 간다면, (후배들이) 잘 따라와주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강진구 기자 realni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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