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큰 아이들, 연로하신 어머니
사랑하는 이를 내 삶의 맨 앞에 두는
내가 내 삶의 주인 되는 내가 되길
일주일 정도 출장을 다녀왔더니 세상이 크게 바뀌었다. 그 사이에 벚꽃은 지고, 철쭉이 활짝 피어났다. 산기슭의 애기붓꽃은 이미 고운 자태를 잃어가고, 꽃봉오리처럼 예쁘게 피어오르는 개옻나무 순도 그 사이에 이미 다 자라났다. 봄이 잰걸음으로 스쳐가는 날들에는 하루가 한 주일인 양 매일이 새롭다. 잠시 한눈을 팔면 그 사이에 봄은 지나고 없다. 그래도 봄은 내년에 다시 오마 하는 기약은 하고 떠나간다.
아이들도 봄처럼 자란다. 봄은 다시 오는데 아이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은 다시 오지 않는다. 일에 쫓기다 정신 차려 보면 나와 같이 놀고 싶어 울며 매달리던 아이가 어느새 다 커서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내 책상 위 액자 속에서 다섯 살과 세 살 난 딸아이가 환히 웃고 있다. 나의 귀여운 아이들은 우주의 어디만큼 걸어가고 있을까. 반 지하 문간방 앞 골목에서 커다란 눈망울로 달려와 안기던 아이들이 너무 보고 싶은 날이면 혼자서 무궁화호 열차를 탄다. 아이를 위한다며 아이와 함께할 시간까지 뒤로 미루며 일에 치이다 보니 아이와 나는 공유할 것이 별로 없는 그러한 사이가 되었다.
어버이날을 앞둔 휴일, 잠깐 시간 내어 어머니를 뵈었다. 어릴 때 다니던 초등학교를 지나고, 신작로 길가의 마을을 지나 목너메 고갯길이 보이는 들길에 들어섰다. 초등학교 때 오후반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던 해거름녘, 십리 길 내내 따라오던 봄 내음이 추억처럼 차창으로 스친다.
마을 입구에 어머니 전기차가 보여 회관에 얼굴을 내미니 마을 노인들 몇 분과 함께 계시던 어머니가 나를 반긴다. 어머니와 함께 집으로 가니 나를 닭장으로 이끄신다. 수탉 한 마리에 암탉 여섯 마리. 알을 낳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조그마한 초란부터 좀 더 큰 알까지 귀여운 알들이 둥지에 놓여 있다. 갓 낳아 따끈따끈한 알을 골라 주시며 이걸 먹이고 싶어 함께 왔다고 하신다. 장독대 감나무 아래서 고개를 들어 날계란을 한 모금 마시다 보니 할머니께서 몰래 챙겨주실 때 먹으며 바라보았던 그 하늘이 눈에 들어온다.
고향 집에서 어머니까지 뵙고 오니 타임머신을 타고 꿈길로 과거에 다녀온 느낌이다. 고향은 어머니가 계신 곳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내 고향도 사라질 것이다. 여기저기 고추 모종 꽂아 놓고, 오이도 심어 놓으신 어머니가 반기시는 동안까지 내 고향은 거기에서 살아 숨 쉬고 있을 것이다. 2년 전에 쓴 글 속의 어머니와 달리 오늘 만난 구순을 앞둔 어머니는 이제 숨이 차서 대문 앞까지도 걷기조차 힘드시다고 하셨다. 그런데도 나는 시간에 쫓겨 올봄 어머니를 자주 뵙지 못했다.
스티븐 코비는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이라는 책에서 급한 것이 아니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우선순위에 놓는 삶이 성공한 삶이라고 이야기한다. 그것을 뻔히 알면서도 급한 일에 쫓겨 정작 중요한 일을 뒤로 미루었다가 뼈저리게 후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페르난도 트리아스데 베스의 소설 ‘시간을 파는 남자’의 주인공 ‘보통남자(TC)’는 잠 못 이루던 어느 날 밤 자기 인생 대차대조표를 만들어 따져 보다가 은행 융자로 산 집을 포함하여 지고 있는 빚을 갚기 위해서는 35년을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소설의 주인공처럼 우리는 시간을 저당 잡힌 노예가 되어 매일매일을 시간에 쫓기며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리나 아코스타(Rina Mae Acosta) 등이 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아이들 – 네덜란드의 길’에 보면 야간근무보다는 가족과 함께할 저녁시간을 택하며 대신 검소하게 살아가는 네덜란드인의 이야기가 나온다.
오월, 나는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 그리고 세상을 위해서라고 나를 위로하며 휴일에도 연구실에 앉아 글을 쓰고 있다. 이젠 머리로만이 아니라 가슴으로도 성공하는 사람들의 습관을 몸에 익히자. 사랑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추억을 만들 기회를 삶의 가장 앞에 두는,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는 그러한 내가 되자.
박남기 전 광주교대 총장ㆍ대한교육법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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