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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인도네시아 ‘족자카르타’ 첫 예비여왕 “행복은 소득순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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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인도네시아 ‘족자카르타’ 첫 예비여왕 “행복은 소득순 아니다”

입력
2019.05.07 04:40
수정
2019.05.07 17:24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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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자, 전기 안 들어오는 마을도 있지만 印尼 행복지수 1위

2021년 족자~인천 직항노선… 한국 신재생에너지에 관심

예복을 차려 입은 망쿠부미 공주. 공주는 족자카르타 왕국의 첫 여성 왕위 계승자다. 족자카르타 왕궁 제공
예복을 차려 입은 망쿠부미 공주. 공주는 족자카르타 왕국의 첫 여성 왕위 계승자다. 족자카르타 왕궁 제공

인도네시아는 왕이 없는 민주공화국이지만, 술탄(왕)이 실질 지배하는 땅도 있다. 자바섬 중남부의 족자카르타(족자) 특별 주(州)다. 천년 고도(古都) 족자는 자바의 정신이자 정수리다. 왕은 행정직제상 주지사지만, 헌법에 의해 주지사직 세습 및 공무원 임면권 등의 자치권을 보장 받는다. 주민들 역시 그를 왕으로 떠받든다. 상징적이지만 오직 충정으로 거의 무보수로 궁정을 지키는 군대도 있다. 인도네시아 34개 주 중 유일하게 ‘공화정 속 왕국’인 셈이다. 이는 다른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통치 구조다.

현재 술탄은 하멩쿠부워노(Hamengkubhuwonoㆍ73) 10세. 슬하 공주만 다섯이다. 개국 260년, 재위 26년째인 2015년 5월 5일 왕은 망쿠부미(Mangkubumi) 칭호를 하사하며 맏딸을 후계로 책봉했다. 망쿠부미는 ‘땅을 지키는 자’라는 뜻으로 건국시조의 이름이자, 현 왕이 세자 때 받은 명칭이다. 차기를 노리던 왕의 형제 14명이 일부 보수 무슬림을 모아 ‘술타나(여왕) 옹립은 예법에 어긋난다’고 반발했다. 왕은 “남녀는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 그것이 헌법”이라고 설득하며, 헌법재판소에 청원까지 했다. 2017년 11월 헌재는 왕의 손을 들어줬다.

족자카르타 왕국의 술탄 하멩쿠부워노 10세 부부(앞줄 가운데)와 망쿠부미(뒷줄 오른쪽 두 번째) 공주 등 다섯 자매와 및 사위들. 망쿠부미 공주 제공
족자카르타 왕국의 술탄 하멩쿠부워노 10세 부부(앞줄 가운데)와 망쿠부미(뒷줄 오른쪽 두 번째) 공주 등 다섯 자매와 및 사위들. 망쿠부미 공주 제공

구스티 칸증 라투 망쿠부미(Gusti Kanjeng Ratu Mangkubumi)라는 긴 이름을 가진, 족자의 첫 예비 여왕 망쿠부미(47) 공주를 지난 1일 자카르타에서 550㎞ 떨어진 족자 왕궁 식당에서 알현했다. “한국 언론으로는 한국일보가 첫 인터뷰”라고 했다. 첫인상에 그만 ‘이 분, 공주 맞아?’ 경망스런 독백을 뱉을 뻔했다. 공주는 뿔테안경에 머리를 질끈 묶고, 흰색 블라우스와 검은색 바지 차림으로 나타났다. 평범하다 못해 무구했다.

망쿠부미 공주는 지난해 한국을 처음 방문했다. 특히 한국의 신(新)재생에너지 사업, 한복과 비단, 동물복지 양계에 관심이 많다고 했다. 신(新)공항 건설, 노면전차(트램) 개통 등 투자 유치를 위한 노력도 소개했다. “족자와 인천국제공항을 잇는 직항노선도 곧 생긴다”고 강조했다. ‘돈보다 행복’ ‘건강한 식품’이 그가 꿈꾸는 세상이다. 그 길의 동반자로서 더 많은 한국 기업이 자신의 땅에 투자해 주길 바랐다.

공주는 “대체로, 대개는(Mostly)”이라는 단어를 말의 첫머리마다 내세워 대화 상대와 상황을 긍정했고, 길지만 단호하게 “예~스!”라고 끝맺으며 동의를 구하거나 상대방을 인정했다. 재치 있는 농담과 스스럼없는 친절도 자태에 녹아 있었다. 왕위를 위협하는 삼촌들의 집단 반발에 와신상담하며 정치적 입지를 차곡차곡 다진 세월도 영향을 미쳤을 게다.

인도네시아 족자카르타 왕가의 첫 여성 왕위 계승자인 망쿠부미 공주가 1일 한국일보와 인터뷰하면서 웃고 있다. 족자카르타=고찬유 특파원
인도네시아 족자카르타 왕가의 첫 여성 왕위 계승자인 망쿠부미 공주가 1일 한국일보와 인터뷰하면서 웃고 있다. 족자카르타=고찬유 특파원

공주와 인터뷰하면서 위엄과 권위는 겉모습이 담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공주는 동갑인 기자보다 며칠 먼저 태어난 사실을 무척 강조했다. 차기 술탄이 아닌 새로 사귄 벗과의 유쾌한 점심식사처럼 여겨졌다. 그렇게 2시간이 훌쩍 지났다.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나.

“작년 4월 처음 갔다. 4박5일 부모님과 함께 서울에서 푹 쉬다 왔다. 한국 음식과 의상에 매료됐다. 연구해 보고 싶다. 비단은 내 전공이기도 하다.” 그는 2003년 세계비단협회 부회장, 2006년 인도네시아비단협의회 회장 등을 역임하고, 현재 족자 수공예제작수출협회(KADIN) 회장을 맡고 있다.

-한국 대통령을 만났나.

“쇼핑이 좋다(웃음). 이번엔 가족들과 휴식 차 조용히 다녀왔다. 다음엔 더 많은 곳을 가보고,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싶다.” 인도네시아 정부 직제상 주지사인 국왕은 장관급, 공주는 차관급이다. ‘공화국 속 왕국’이다 보니 다른 국가를 상대하는 외교권은 없다.

-한국과의 관계는 어떤가.

“족자에는 한국 기업이 많다. 다만 대기업은 없고 중소기업들만 있다. 곧 개항할 신공항에 2021년부터 족자-인천 직항노선이 생긴다. 신공항부터 족자 시내까지 트램도 깔았다. 2시간 걸리던 길을 20~30분이면 올 수 있다. 투자하면 부지도 영원히 사용할 수 있는 등 투자 환경도 인도네시아 다른 지역보다 낫다. 더 많은 한국 기업이 오기를 바란다.”

-어떤 분야의 투자를 원하나.

“한국에는 좋은 회사가 많다. 특히 족자는 농업과 기술을 접목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다. 소 배설물, 낙엽과 쓰레기를 이용한 폐기물에너지(Waste To Energy) 사업을 해보고 싶다. 풍력 발전, 태양광 발전도 관심 분야다. 아직 전기가 안 들어오는 마을이 있어 소규모로 여러 곳에 짓고 싶다. 주민들이 손쉽게 쓸 수 있도록 작지만 어디든 있으면 좋겠다.”

그는 동석한 백남희 한국중부발전(KOMIPO) 인도네시아 법인장에게 “소 40마리가 있으면 몇 가구에 전기를 공급할 수 있는지” “풍력과 태양광 발전의 비용과 효율은 각각 어느 정도 되는지” 등을 묻고 답을 듣더니, 담당 변호사를 불러 상의하고 추가로 필요한 부분을 지시하기도 했다.

족자카르타 왕국의 왕궁 뒤편에 있는 왕실 소유 식당 '발레 라오스'. 음식을 먹는 장소, 맛이 있는 곳이란 뜻이다. 화려하지 않고 소박하다. 족자카르타=고찬유 특파원
족자카르타 왕국의 왕궁 뒤편에 있는 왕실 소유 식당 '발레 라오스'. 음식을 먹는 장소, 맛이 있는 곳이란 뜻이다. 화려하지 않고 소박하다. 족자카르타=고찬유 특파원

-족자는 인도네시아 34개 주 중 가난한 지역에 속하는데.

“한 달 평균 식비가 40만루피아(3만2,000원) 이하면 가난한 지역이라는 조사 결과가 있더라. 우리는 한참 밑인 10만루피아(8,000원)다. 그런데 우리는 먹을 것을 직접 키우기 때문에 그만큼 식비가 덜 든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외식비라 해봐야 3,000루피아(240원)짜리 국수(mie)를 사먹는 게 전부다. 물가도 다른 지역보다 싸다. 이런 점들을 고려해야 한다. 무엇보다 우리는 행복지수가 인도네시아 내에서 1위다. 평균 수명도 높아 장수 지역에 속한다. 가난한 9%를 위한 복지도 마련돼 있다. 소득(income)이 높다고 행복한 건 아니다. 남들 보기엔 가난해도 우리는 행복하다.”

-왕위 계승 수업은 받고 있나, 현재 맡고 있는 일은.

“특별한 건 없다. 딸로서 의무를 다하고 아버지를 보고 배울 뿐이다. 2002년부터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관련 업무를 맡고 있다. 여성, 복지, 동물 보호에도 관심이 많다. 보호구역에 있는 오랑우탄 10마리도 보살피고 있다.”

그는 현재 족자 상공회의소 의장이자 족자 동물보호협회 의장이다. CSR포럼 위원장이기도 하다. 왕족 관리, 왕실 의식 등 왕궁 살림도 도맡는다. 동생들과 세계 여러 곳을 다니며 자바 전통 무용을 무대에서 직접 선보일 정도의 춤 실력도 보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16세 때부터 춤을 췄다”고 했다.

-앞으로 계획은.

“동물복지(유기농) 양계 사업을 하고 싶다. 케이지(아파트공장 형태의 철망 우리)에서 키운 닭들은 항생제 주사를 너무 많이 맞아서 건강에도 좋지 않다. 교육을 받아서 건강한 식품을 만들고 싶다. 가격보다 품질을 중시하는 시대 아닌가, 생산 가공 판매망을 모두 갖춘 기술을 전수받고 싶다. 비료도 만들고 싶다.”

인도네시아 족자카르타 왕가의 첫 여성 왕위 계승자인 망쿠부미 공주가 1일 한국일보와의 인터뷰를 마치고 왕궁 식당을 소개하고 있다. 족자카르타=고찬유 특파원
인도네시아 족자카르타 왕가의 첫 여성 왕위 계승자인 망쿠부미 공주가 1일 한국일보와의 인터뷰를 마치고 왕궁 식당을 소개하고 있다. 족자카르타=고찬유 특파원

인터뷰 뒤 “의복이 평범하니 예복을 입고 찍은 사진을 보내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망쿠부미 공주는 휴대폰에 저장된 가족 사진과 활동 사진을 설명까지 곁들여 보여주며 골라 가져가라고 했다. 몇 개를 고르자 즉석에서 이메일 주소를 입력하게 했다.

주변 사람들은 그런 공주의 소탈하고 격의 없는 품행이 실제 모습이라고 했다. 가신(家臣)이자 수행비서인 아식(30)씨를 동생처럼 대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공주의 동생들은 “언니가 가족과 시간을 보내기 힘들 정도로 열심히 일한다”고 할 정도다. 싱가포르 미국 호주에서 유학한 망쿠부미 공주는 2002년 평민과 결혼해 1남1녀를 두고 있다. 궁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있다는 그의 사저는 “소박하지만 기품이 있다”고 알려졌다.

CSR 활동을 하며 공주와 친분을 쌓은 이창현 코트라 자카르타 무역관 부관장은 “한 번은 행사에 늦길래 전화했더니 ‘직접 운전하고 왔는데 주차할 곳이 없어 찾고 있다’고 하더라”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사리분별이 밝아 업무 처리는 꼼꼼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라며 “외유내강 리더”라고 설명했다. 또 다른 한인 사업가는 “사석에선 위아래 없이 너그럽지만 공개석상에선 똑 부러지게 위엄을 보인다”고 했다.

예복을 차려 입은 망쿠부미 공주. 공주는 족자카르타 왕국의 첫 여성 왕위 계승자다. 족자카르타 왕궁 제공
예복을 차려 입은 망쿠부미 공주. 공주는 족자카르타 왕국의 첫 여성 왕위 계승자다. 족자카르타 왕궁 제공

대화가 예상보다 길어져서 정작 왕궁(정식 명칭 Kraton Ngayogyakarta Hadiningrat)은 들어가보지도 못했다. 특혜(?)를 은근히 바랐으나 망쿠부미 공주는 “일반 관람이 끝나는 오후 2시 이후엔 나도 못 들어간다”고 했다. 족자 왕궁의 유물 대신 왕국의 정신을 보았으니 그걸로 족하다.

족자카르타=고찬유 특파원 jutda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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