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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야구장에 갔다

입력
2019.05.06 04:40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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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날인 5일 오후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KBO리그 LG 대 두산 경기에 앞서 두산 박치국, 이영하, 김대한, 이형범이 어린이들과 함께 단체 줄다리기 시합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어린이날인 5일 오후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KBO리그 LG 대 두산 경기에 앞서 두산 박치국, 이영하, 김대한, 이형범이 어린이들과 함께 단체 줄다리기 시합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평일이라 일반 관중석은 한적한데, 맞은편 홈 구단 응원석에는 빈자리가 거의 없다. 전광판 속에서 짧은 팬츠를 입은 치어리더들이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춤을 춘다.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환호하고 막대 풍선을 두드리며 응원가를 부른다. 내 귀에도 들리는 노래가 있다. 베토벤의 9번 교향곡 ‘환희의 송가’ 주제 부분이다. 들어본 중에 가장 떠들썩한 ‘합창’이다. 베토벤이 이런 상황을 본다면 기뻐할지 슬퍼할지 잘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야구를 본 게 언제였나. 기억을 더듬어 본다. 청룡이니 타이거즈니 하는 이름들이 오르내릴 무렵이니 20세기 후반이다. 솔직히 나는 스포츠에 관심이 전혀 없다. 온 나라가 축구 열기로 끓어오르던 2002년 월드컵 때도 식구들이 죄다 TV 앞에 앉아 있으니 오다가다 몇 장면을 슬쩍 본 정도다. 그나마 야구는 ‘공포의 외인구단’ 같은 만화를 탐독하면서 경기 돌아가는 방식을 깨우치기는 했다. 딱 한 번 직접 관람했다.

스포츠를 좋아하지 않는 내가 한 세기에 한 번쯤은 야구 구경을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야구장에 온 건 물론 아니다. 며칠 우울했던 기분 탓이다. 인간관계에서 사소한 마찰들이 있었고, 성사되기를 간절히 바라던 일이 좌절되었다. 응어리진 마음을 흘려보내려면, 늘 가던 곳이 아닌 곳에 가고, 늘 하던 일이 아닌 일을 하고, 늘 만나던 사람이 아닌 사람을 만나는 게 낫다. 과연 시야 한 가득 초록빛이 펼쳐진, 거대한 UFO 내부 같은 관중석에 앉으니 마음이 풀어진다. 순식간에 시공간의 다른 차원으로 이동한 느낌이랄까. 치킨과 맥주까지 곁들이니 막 유쾌해지려 한다. 사람들이 더 편안하게, 더 자세히 볼 수 있는 TV 시청을 마다하고 굳이 야구장에 오는 이유를 이해할 것 같다.

중심에서 플레이하는 선수들을 보며 감탄한다. 어떻게 저렇게 빠른 공을 던지나. 어떻게 저렇게 쏜살같이 달려 나가나. 어떻게 저 순간의 스트레스를 견디나. 혹독한 훈련의 덕택일까, 타고난 근육과 운동신경이 뛰어나서일까. 움직임이 날렵하고 근육의 힘이 강인하며 정신력까지 튼튼한 사람들을 볼 때마다 떠올리는 질문이다.

내가 스포츠를 좋아하지 않게 된 이유는 명백하다. 몸의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백 미터 달리기에서 20초를 넘기는 아이들 집단에 속하게 되면서 그 사실을 깨달았다. 학교 들어가기 전에는 사정이 좀 달랐다. 동네 앞산에 올라갈 때도 뒤쳐진 적이 없었고, 누가 더 높은 곳에서 뛰어내릴 수 있나 경쟁할 때도 빠지지 않았다. 낮은 1층 높이의 창고 지붕에서 뛰어내릴 수 있는 아이는 나밖에 없었다. 그러나 체육시간에는 죄다 소용없는 능력이다.

담장으로 둘러싸인 푸른 잔디 위에서는 선택된 사람들만이 게임에 참가할 수 있다. 그들이 멋진 유니폼을 입고 마운드에 올라설 때마다, 헬멧을 쓰고 타석에 들어설 때마다, 관중석은 수군거린다. 저 선수가 연봉이 수십억이란다. 방어율이 얼마이고, 타율이 어느 정도란다. 미국에 간 누구는 연봉이 이백 억을 넘었단다.... 그 순간 하얀 공이 포물선을 그리며 하늘 높이 떠오른다. 글러브를 낀 채 담장 바로 밖에서 서성이고 있던 사람들이 공이 떨어지리라 예상되는 지점으로 황급히 달려간다. 넘어지고 구르면서 몸을 던진다. 허공을 향해 잠자리채 같은 것을 휘두르기도 한다. 우습고 눈물 난다.

나에게 공이 날아온다면 어떨까. 푸른 하늘을 가르며 담장을 넘어온 공이 뜻밖에도 나를 향해 날아온다면. 상상만 해도 짜릿하다. 다음에 야구장에 올 때는 잠자리채라도 준비해야지. 누가 알겠는가, 좌절과 실패를 거듭하다가 어느 순간, 담장을 넘어온 공을 손에 쥐는 완벽한 체험을 하게 될는지.

부희령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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