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사노위 기초생활보장 부양의무자 폐지 권고문… 기재부 반대로 합의문 도출 못해
대통령 직속 사회적 대화기구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가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부양의무자 기준을 내년부터 폐지하라는 내용의 권고문을 3일 발표했다. 생계급여 수급자격을 제한하는 독소조항을 폐지해 빈곤층에게 최소한의 생활 수준을 보장하자는 취지이지만, 기획재정부가 재정부담을 이유로 부정적 입장을 보여 노사정 합의문 도출엔 실패했다. 노사와 전문가집단(공익위원)이 합의한 복지 사각지대 해소 방안을 두고 ‘포용국가’를 강조하던 정부가 어깃장을 놓은 셈이다.
경사노위 산하 사회안전망개선위원회(위원회)는 이날 ‘빈곤문제 완화를 위한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개편방안’을 채택하고 우선 내년에 노인과 중증장애인에 대한 부양의무자 기준부터 전면 폐지할 것을 권고했다. 다른 대상자에 대해서도 중앙생활보장위원회의 논의를 거쳐 단계적으로 폐지한다는 방침을 내놨다. 현행 제도에선 빈곤층이라도 일정한 소득이나 재산이 있는 가족 등 부양의무자가 있는 경우 생계급여를 받을 수 없다. 이 때문에 서류상으로는 부양의무자가 있지만 도와줄 여력이 없거나 가족관계가 끊긴 탓에 기초생활급여를 받지 못하는 ‘비수급 빈곤층’이 2015년 기준 93만명(63만 가구)에 달했다. 2016년 기준 46%에 달하는 노인 빈곤율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
위원회는 또 생계급여의 문턱을 낮추라고 주문했다. 2021년까지 현재 중위소득 30% 이하인 수급자 선정기준을 단계적으로 올리고 자동차 등 재산을 소득으로 환산하는 비율을 낮추는 등 생계급여의 기준이 되는 중위소득을 산출하는 방식도 조정하라는 요구다. 이밖에 다가오는 7월부터 장애등급제가 폐지되면 장애 정도를 중증과 경증으로 따지게 되는 만큼, 이 과정에서 기존에 수급자였던 장애인에 대한 지원이 줄어들지 않도록 하는 대책 마련도 촉구했다.
그러나 권고문의 내용이 실현될지에 대해선 장담하지 못했다. 논의 과정에서 보건복지부는 적극적이었지만 예산을 쥔 기재부가 부정적 입장을 보여 경사노위의 정책발표 가운데 처음으로 ‘합의문’이 아닌 ‘권고문’ 형태를 취했기 때문이다. 앞서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은 내년에 마련할 ‘제2차 기초생활보장 종합계획(2021~2023)’에 부양의무자 기준 전면 폐지를 담겠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이 역시 예산당국이 반대할 경우 실현되기 어렵다.
장지연 위원장은 “대한민국에서 노사는 조세를 마련하는 가장 중요한 주체다. 이 두 주체가 서로 동의해 대한민국에선 이런 제도를 추진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메시지를 정부에 줬고, 정부도 무겁게 받아들이리라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정부는 생계급여에 대해 부양의무자 기준을 전면 폐지할 경우 추가로 연간 1조원 내외의 재정이 소요될 것으로 보고 있다. 최근 손병돈 평택대 교수 연구에서도 연간 8,000억~1조원 정도로 추산됐다. 그러나 위원회 공익위원인 노대명 보건사회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우선적으로 노인과 중증장애인에 대해 부양의무제를 폐지한다고 해서 폭발적으로 재정 부담이 늘어나진 않을 것이라는 의견을 내놨다. 노 위원은 “지난해 주거급여에 대해 부양의무자 기준을 폐지했을 때 사전 연구의 추정치보다 실제로는 훨씬 적은 금액이 소요됐다”면서 이번에도 훨씬 적은 금액이 지출될 것으로 전망했다.
일각에선 재정당국이 내년 총선을 앞두고 증세 논란을 우려한 나머지 복지제도 확대에 지나치게 소극적으로 임한다는 비판이 나온다. 지난달 24일 확정한 추가경정예산은 모두 6조7,000억원. 효과가 불투명한 미세먼지 감축에만 1조5,000억원을 투입하면서 빈곤층의 생계는 외면한다는 지적이다.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공동운영위원장은 “문재인 정부의 재정정책은 포용국가와 배치된다”며 “지난해 기준 한국의 조세 부담률(21%)을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평균 수준(25%)으로 끌어올리면 추가로 연간 75조원의 재정을 확보할 수 있다”라고 강조했다. 한국 경제규모에서 부양의무자 기준 폐지는 충분히 감당 가능한 카드라는 주장이다.
김민호 기자 km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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